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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화와 하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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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영화를 사랑하는 대학생, 영대생입니다. 영화와 함께하는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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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3 Jun 2026 22:40: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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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영대생</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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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화와 하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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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네트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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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490&quot; data-origin-height=&quot;700&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bywhuL/btrKZ7TptQV/mbnwySRjck8TxFMt2qBGB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bywhuL/btrKZ7TptQV/mbnwySRjck8TxFMt2qBGB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ywhuL/btrKZ7TptQV/mbnwySRjck8TxFMt2qBGB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ywhuL%2FbtrKZ7TptQV%2FmbnwySRjck8TxFMt2qBGB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90&quot; height=&quot;700&quot; data-origin-width=&quot;490&quot; data-origin-height=&quot;700&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1. 문득 이런 궁금함이 들었다. 왜 하필 뮤지컬 영화일까? 왜 갑자기 영어로 영화를 찍은 것일까? 왜 이번에는 드니 라방이 없을까? 무언가 레오스 카락스 답지 않은 것들이 한데 합쳐져 다가왔을 때의 당혹감. 이런 질문은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를 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질문들이다. 물론 레오스 카락스는 이미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뮤지컬 장르의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amp;lt;홀리 모터스&amp;gt;에는 뮤지컬 장면이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네 번째 영화인 &amp;lt;폴라 X&amp;gt;에서 이미 드니 라방 없이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그러니 &amp;lt;아네트&amp;gt;를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적 전환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진정한 전환점은 물론 &amp;lt;홀리 모터스&amp;gt; 일 것이다. 대신 레오스 카락스는 &amp;lt;아네트&amp;gt;에서 스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와 대척점에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대척점? 하나의 대칭을 이루는 반대항. 레오스 카락스 필모그래피와의 대칭.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amp;lt;홀리 모터스&amp;gt;와의 대칭. 두 영화는 하나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지점에 머물러 있다. 영화적 정반합. 자신의 과거와 대항하며 만들어낸 안티테제의 변증법.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전작들, 특히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경유해야 할 것 같다. 레오스 카락스는 21세기가 시작되고 12년이 지나서야, 그가 네 번째 장편 영화인 &amp;lt;폴라 X&amp;gt;를 만들고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의 다섯 번째 장편 영화인 &amp;lt;홀리 모터스&amp;gt;를 완성했다. 그 공백 기간 동안 그에게 정확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레오스 카락스는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그 간극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간극? 20세기의 레오스 카락스와 21세기 레오스 카락스 사이의 간극. 그건 어떤 간극인가? 그 간극에는 무엇이 있는가? 레오스 카락스는 1986년 드니 라방과 함께 '사랑 3부작'(&amp;lt;소년, 소녀를 만나다&amp;gt;, &amp;lt;나쁜 피&amp;gt;, &amp;lt;퐁네프의 연인들&amp;gt;)을 만들었다(&amp;lt;폴라 X&amp;gt;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랑에 관한 영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동력으로 운동하는 드니 라방의 육체에 관한 영화. &amp;lt;나쁜 피&amp;gt;를 본 사람이라면 데이빗 보위의 음악에 맞춰 길 위를 춤추며 달려가는 드니 라방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는 운명에 대한 저항. 해소될 수 없는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운동. &amp;lt;퐁네프의 연인들&amp;gt;에서 불꽃놀이에 맞춰 드니 라방과 줄리엣 비노쉬가 춤추는 장면 또한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보인다. 감정의 운동. 육체를 매개한 감정의 운동. 그러한 운동의 끝에서 드니 라방은 비극을 맞이한다. 그 비극이란 드니 라방의 사랑이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서 나타나는 거대한 간극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랑이 메울 수 없는 간극. 그 간극을 뛰어넘고자 할 때 발생하는 비극. &amp;lt;소년, 소녀를 만나다&amp;gt;에서 여주인공을 구하려는 드니 라방의 시도가 여주인공을 죽게 하는 역설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레오스 카락스는 사랑 3부작에서 이러한 감정의 비극을 서사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랬던 레오스 카락스가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는 그 방법론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무엇보다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는 어떠한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가 진행되고자 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곧장 그 서사를 멈추고 새로운 서사를 투입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의 육체.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서사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드니 라방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서사이다. 이때의 육체는 특정 인물을 연기하는 육체가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 그 자신의 육체이다. 광인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며,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육체. 사랑 3부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찬 드니 라방의 육체는 이제 어떤 감정도 없이, 더 정확히는 어떤 감정이든 들어올 수 있는 순수한 육체로 변한다. 이 변화는 마치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13년 간 겪은 공백의 결과처럼 보인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한 질문. 무엇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그럴 때 레오스 카락스는 많은 시네아스트들이 그러하듯이 메타 영화라는 방법론으로 돌아섰다. 질문의 영화화. 그렇기에 인물을 찍는 대신 배우를 찍고, 서사를 만드는 대신 서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찍는다. 레오스 카락스는 그 방법론을 &amp;lt;아네트&amp;gt;에서도 밀어붙인다. 하지만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향한다. &amp;lt;아네트&amp;gt;에는 드니 라방이 없다.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 영화이다. 게다가 모든 장르를 담아내고자 했던 &amp;lt;홀리 모터스&amp;gt;와는 다르게 &amp;lt;아네트&amp;gt;는 뮤지컬이라는 확고한 장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낸 안티테제. 두 개의 테제가 충돌할 때 이 변증법의 결과물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나는 이제부터 이 대칭과 충돌의 선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lt;br&gt;&lt;br&gt;2. 먼저 &amp;lt;아네트&amp;gt;의 줄거리를 거칠지만 간단히 정리해보자. 스탠드 업 코미디언인 헨리와 오페라 배우 앤은 결혼을 하고 딸 아네트를 낳는다. 그 후 앤은 오페라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는 반면 헨리는 코미디언으로서 계속 전락을 거듭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헨리는 요트 여행에서 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그 사건으로 앤의 영혼이 딸 아네트에게 들어가고 아네트는 엄마 앤과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 실력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헨리는 생전 앤과 친했던 지휘자 친구와 함께 딸 아네트를 데리고 투어를 다니며 돈과 명성을 쌓아 올린다. 그러다가 지휘자 친구가 앤의 과거 연인이며 아네트의 진짜 아버지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헨리는 지휘자 친구를 수영장에 빠뜨려 죽인다. 그 모습을 본 아네트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에서 노래하는 대신 아버지의 살인 사실을 알리고 헨리는 감옥으로 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숙해진 아네트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 헨리를 면회하고 아버지와의 절연을 선언하면서 떠난다. &amp;lt;아네트&amp;gt;의 줄거리는 이게 전부이다. 굳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amp;lt;아네트&amp;gt;가 이 평면적이고 관습적으로 보이는 서사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amp;lt;아네트&amp;gt;는 서사적으로 다층적인 영화가 아니며 따라서 서브 텍스트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영화. 그렇다고 &amp;lt;아네트&amp;gt;가 이러한 고전적인 서사에 찬가를 보내는 영화도 아니다. 이상할 정도로 평면적인 서사는 분명 레오스 카락스가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보여주었던 끊임없이 발산하고 불투명한 서사와 정반대 지점에 있다. 레오스 카락스는 그것을 첫 장면에서부터 확실히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들려오는 레오스 카락스의 내레이션. &quot;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집중해주십시오. 노래나 웃음, 박수, 울음, 하품, 야유, 방귀는 부디 머릿속에서 해주십시오. 이제 침묵을 유지하시고 쇼가 끝날 때까지 숨을 멈춰주십시오. 숨 쉬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십시오.&quot; 이 내레이션을 듣는 순간 누구든지 &amp;lt;홀리 모터스&amp;gt;의 오프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장 안에서 죽어있는 관객들. 마치 영화를 외면하는 것만 같은 관객들을 레오스 카락스가 비밀통로를 통해 마주하고 그 사이를 아기와 개가 유유히 활보하는 오프닝.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탄식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탄식? 영화(좀 더 정확히는 레오스 카락스 자신이 추앙하는 고전 영화의 아름다움) 앞에서 눈 감고 죽어있는 관객에 대한 탄식. &amp;lt;홀리 모터스&amp;gt;는 그 관객들을 죽음에서 깨우고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생각하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기 위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리무진과 드니 라방의 육체. &amp;lt;홀리 모터스&amp;gt;를 밀고 나아가는 동력은 이러한 영화 자체의 역동성이다. 그런데 전작에서 그렇게 관객을 깨우고 싶어 했던 레오스 카락스가 이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에게 죽을 것을 요청한다. 마치 자신의 전작을 부정하는 듯한 선언. 레오스 카락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영화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관객처럼 죽을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내레이션이 끝난 후 화면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준비하는 레오스 카락스와 스파크스의 모습이 이어진다. 준비를 마친 뒤 레오스 카락스는 자신의 딸 나스탸를 곁에 부른 후 마이크를 통해 말한다. &quot;자, 시작해도 될까?(So, may we start?)&quot; 이 말을 시작으로 스파크스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뮤지컬이 시작된다. 녹음을 하던 러셀 마엘과 론 마엘이 노래를 부르며 걸어 나가고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먼 헬버그가 대열에 참여해 노래를 이어 부른다. 그리고 노래를 마치면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는 각각 헨리와 앤이 되어 영화 속으로 떠난다. 분명 이 장면은 영화 전체, 아니 레오스 카락스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입체적이고 역동감 넘치며 배우의 활력으로 가득 찬 장면일 것이다. 영화와 배우의 역동성이 결집된 오프닝.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이 오프닝 이후 영화에는 이러한 역동성을 지닌 뮤지컬 장면이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영화 내내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어지나 이 장면들은 단지 대사를 노래로 옮겨 부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나 후반부로 갈수록 헨리가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거의 강박적이라는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amp;lt;아네트&amp;gt;에 대한 비판 중에는 이러한 강박적인 노래의 사용과 주연배우인 아담 드라이버의 부족한 노래 실력에 관한 언급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레오스 카락스가 &amp;lt;아네트&amp;gt;에서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믿는 쪽이다. 어떤 전략? 자신이 대항하고자 하는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더욱 멀어지기 위한 전략. 반복해서 말하겠다. &amp;lt;홀리 모터스&amp;gt;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배우의 육체를 바라보는 영화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몸. 무엇이든 찍을 수 있는 카메라. 그러나 &amp;lt;아네트&amp;gt;에서 배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강박적으로 소화한다. 바꿔 말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배우들이 소화하고 있는 한 가지 배역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것만 같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mp;lt;홀리 모터스&amp;gt;와 &amp;lt;아네트&amp;gt;의 공통점은 두 영화 모두 영화에 관한 영화, 즉 메타 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에 위치시키는가에 있다. &amp;lt;홀리 모터스&amp;gt;는 영화 바깥의 시선에서 영화를 찍는 행위를 바라본 작품이라면 &amp;lt;아네트&amp;gt;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의 심연에 몸소 뛰어들어 만든 작품이다. 시선의 차이는 곧 태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레오스 카락스는 (비록 묵시록적으로 보이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씨네필로서 영화와 배우의 아름다움에 찬가를 보낸다면 &amp;lt;아네트&amp;gt;에서는 영화감독이라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소하고 냉소한다. &amp;lt;아네트&amp;gt;를 이끌어가는 동력과 정조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자학과 조소이다. 영화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영화를 찍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영화는 아름답지만 영화를 찍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레오스 카락스. 어쩌면 &amp;lt;아네트&amp;gt;가 아름답지 않게 보이는 것은 레오스 카락스 본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lt;br&gt;&lt;br&gt;3. 헨리는 두 번의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가진다. 첫 번째 공연은 보란 듯이 성공하지만 두 번째 공연은 실패한다. 이후 다시는 공연을 하지 못한다. 첫 번째 공연과 두 번째 공연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연을 하는 헨리와 공연을 하지 않는 헨리 사이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 헨리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노래로 대사를 말하며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레오스 카락스는 이 모습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런 헨리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뮤지컬의 인공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오로지 스탠드 업 코미디를 할 때뿐이다. 오히려 그가 공연을 할 때는 관객들이 노래하고 헨리는 그런 관객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헨리 맥헨리를 연기하는 아담 드라이버는 한 배역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언 헨리와 앤의 남편 헨리.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굴레 안에서 자유분방한 코미디언 헨리와 달리 그의 아내 앤의 직업은 오페라 배우이다. 뮤지컬 안에서조차 뮤지컬을 하는 앤(여기서는 뮤지컬과 오페라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긴 논의는 하지 않도록 하자). 말 그래도 뮤지컬을 완전히 체화한 인물. 심지어 그런 앤을 동경하는 지휘자 친구조차 오페라 무대에서 지휘하는 인물 아닌가. 헨리와 앤은 여기서부터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인물들이다. 온 힘을 다해 영화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남자와 온몸으로 영화를 체화하는 여자. 레오스 카락스의 분열된 자아. 영화 내에서 헨리와 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슈퍼스타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만 사랑의 양태는 전혀 다르다. 앤이 사랑받는 것은 무대에서 관객들을 대신해서 죽어주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관객들은 앤의 죽음을 통해 또 하나의 삶을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다(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던가?). 배우를 통해 체험하는 타자의 세계와 삶. 우린 이미 그것을 &amp;lt;홀리 모터스&amp;gt;에서 오스카를 연기하는 드니 라방을 통해 지켜보았다.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배우의 육체. 현실에서 배우가 사라진다고 해도 스크린 위에서 배우가 연기한 인물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스크린 위에서 영원불멸의 형태로 남아있는 배우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관객을 위해 대신 삶을 살고 죽어주는 배우. 도식적으로 보자면 앤은 &amp;lt;홀리 모터스&amp;gt;의 오스카와 같은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반면에 헨리는 어떠한가? 헨리와 앤의 차이는 단순히 저속한 유머를 기반으로 하는 코미디 공연과 고상하고 품격 있어 보이는 오페라의 차이가 아니다. 첫 번째 공연 도중 관객들이 헨레에게 왜 코미디언이 되었는지를 묻자 헨리는 돈이나 명예, 여자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quot;사람들의 적개심을 없애기 위해. 웃기는 게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quot; 이 대사는 물론 정치적인 의미나 존재론적 의미, 혹은 레오스 카락스의 개인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우선 이 대사를 오직 헨리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해석하고자 한다. 헨리는 공연 도중 관객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코미디언이 되었느냐고 묻자 &quot;아니 아니. 아시다시피 나는 심연을 동정해&quot;라고 대답한다. 관객들이 심연이 뭐냐며 웅성거리자 헨리는 마이크로 머리를 치며 &quot;A, B, Y, S, S&quot;라고 한 글자씩 가르쳐준다. 물론 관객들이 심연의 사전적인 의미를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심연이 어떤 메타포인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는 그저 심연의 철자만을 알려주며 그 질문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끈질기게 질문하자 헨리는 결국 &quot;죽지 않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quot;라며 대답한다. 이 말이 끝나고 난 뒤 갑자기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더니 헨리가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본 관객들은 당황하지만 한 남자는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아는 듯이 박장대소한다. 이 쇼트를 보는 순간 누군가는 이것이 킹 비더의 &amp;lt;군중&amp;gt;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오마주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레오스 카락스가 &amp;lt;군중&amp;gt;을 자신의 영화로 끌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amp;lt;홀리 모터스&amp;gt;의 첫 장면. 극장 안에서 죽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관객들. 그 관객들 앞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가 &amp;lt;군중&amp;gt;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amp;lt;군중&amp;gt;은 그저 현대의 관객들이 외면하고 있는 고전 영화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레오스 카락스는 &amp;lt;아네트&amp;gt;에서 &amp;lt;군중&amp;gt;을 더 깊이 끌고 온다. 단순히 영화 바깥에서 소리로만 들려오던 &amp;lt;홀리 모터스&amp;gt;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직접 오마주하고 심지어 (너무나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 영화 중간에 그 마지막 장면을 직접 삽입까지 했다. &amp;lt;군중&amp;gt;의 마지막 장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웃던 주인공 존과 메리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서서히 줌 아웃하며 그와 함께 웃고 있는 객석의 수많은 관객들을 보여주며 영화를 마친다. 이 장면의 핵심은 영화가 자신이 군중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오던 주인공을 조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amp;lt;아네트&amp;gt;는 이 장면을 정반대로 비튼다. 이번에는 모든 관객이 당황하는 사이에서 오직 한 남자만이 웃고 있다. 대신 레오스 카락스가 오마주 한 것은 인물을 향한 조소의 정서이다. 무엇을 조소하는가? 총을 맞고 죽은 연기를 하던 헨리는 번쩍 손을 들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고는 말한다. &quot;봤지? 나도 죽어&quot;. 이때 헨리가 죽는 연기를 한 것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웃기는 것이 살아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진실. 진실이라는 심연. 헨리 본인이 동정한다는 심연. 철저하게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심연. 여기서 헨리는 니체의 말대로 심연을 죽음과 직결시킨다. 자아의 죽음. 심연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 이전의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헨리가 조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 자체이다. 이 순간 그의 조소가 향하고 있는 것은 그의 아내(가 될) 앤과 뮤지컬이다. 앤은 오페라에서 관객들을 대신해서 죽어주며 배우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이때 죽는 것은 앤이 연기하는 인물의 죽음임과 동시에 앤 이라는 자아의 죽음이다. 배우로서 마주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 이후 배우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만을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지는 장르가 뮤지컬 아닌가. 노래와 춤으로 배역을 강조하는 장르. 자유로운 코미디언 헨리의 눈에 그것은 자아의 죽음에 불과하다. 여기서 헨리는 앤과 그녀의 오페라, 그리고 그녀가 몸소 상징하는 영화를 조소한다. 영화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조소하는 코미디언. 그렇기에 헨리는 죽음이라는 심연을 동정한다고 말하고 레오스 카락스가 관객에게 죽을 것을 요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quot;배우가 죽을 시간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죽어주시길 바랍니다&quot;. 여기서 헨리가 코미디언을 하는 이유를 다시 상기해보자. &quot;웃기는 게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quot;.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quot;코미디를 하는 게 뮤지컬의 배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뛰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quot;. 어쩌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헨리가 아닌 헨리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아담 드라이버일지도 모른다. 오프닝에서 마리옹 꼬디아르와 함께 직접 배역에 뛰어들었던 배우의 반항. &quot;나는 죽음으로 가득 찬 뮤지컬이 싫어요. 나는 자유롭게 살아있으면서 코미디를 하는 신의 유인원 헨리 맥헨리가 좋아요&quot;.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조소와 반항. 혹은 그것을 위해 창조된 인물. 레오스 카락스는 이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레오스 카락스가 그를 조소할 차례이다. &lt;br&gt;&lt;br&gt;4. 두 번째 공연을 하기 전 헨리와 앤은 결혼을 하고 딸 아네트를 낳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봉제인형 아네트. 인형술사의 조종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마리오네트 인형. 아직 인간 아네트는 스크린에 등장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아네트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자유로운 코미디언 헨리가 아닌 언제나 타자를 연기하고 죽어야 하는 앤의 운명. 감독의 조종을 받는 배우의 운명. 그건 앤과 결혼한 헨리 역시 더 이상 코미디언이 아닌 앤의 남편이라는 뮤지컬 배역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아네트가 인간이 아닌 봉제인형으로 등장한 것은 헨리를 향한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이다. &quot;넌 절대로 너의 배역에서 벗어날 수 없어&quot;라고 말하는 레오스 카락스. 아마 그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을 것이다. &quot;아무리 싫어도 나는 영화를 찍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게 나의 운명이야&quot;. 그런 헨리가 두 번째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앤의 남편이 된 헨리가 말이다. 어째서인지 그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첫 번째 공연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극장 관객석에 앉아있던 첫 공연의 관객들과는 달리 두 번째 공연에는 객석 대신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과 술잔이 놓여있다. 마치 헨리의 코미디를 즐기는 대신 지켜보고 평가하려는 듯한 관객. 이 차이는 단순히 계급적 차이라기보다는 첫 공연에서의 관객들과 달리 헨리가 자유롭게 지휘할 수 없는 관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연출이다. 마치 앤의 세계에서 넘어온 듯한 관객들. 물론 관객들은 헨리의 유머에 반응하지만 뮤지컬을 통해 그와 소통하지는 않는다. 헨리는 첫 번째 유머에서부터 실패한다. &quot;여기서 웃기라니. 가스실에서 오럴 섹스받으면서 웃으라는 것도 아니고&quot;. 관객들은 이 유머에 웃는 대신 야유를 보낸다. 이 실패의 이유에는 물론 가스실이라는 민감한 단어의 사용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헨리가 이전에 앤과 했던 오럴 섹스를 유머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 유머 속에서 앤은 헨리의 유머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때 헨리와 앤은 뭐라고 했는가? &quot;우린 서로를 너무 사랑해요(We love each other so much)&quot;. 거의 강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반복한 구절. 헨리가 앤을 조소한 것은 동시에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앤의 세계를 조소하는 것이다.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 하지만 이건 관객에게 용납되지 않는 유머이다. 더 정확히는 두 번째 공연에서의 관객이 용납하지 않는 유머이다. 지금 헨리의 자리는 단순히 코미디언이 아닌 앤의 남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제 헨리가 웃겨야 하는 대상은 오페라의 세계, 앤이 뮤즈로 존재하는 세계의 관객이다. 코미디의 세계와 앤의 세계, 헨리와 앤이 각각 뮤즈로 존재하는 세계. 첫 번째 공연에서 헨리의 코미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앤의 세계 바깥에서 앤과 앤의 세계를 조소했기 때문이다. 영화 바깥에서 영화를 조소하기. 그런데 레오스 카락스는 헨리를 뮤즈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철저하게 앤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을 자신의 딸 아네트가 보여주고 있다. 헨리는 그것에 저항하듯이 코미디를 이어나간다. &quot;내가 사실은 오늘 아침에 내 와이프를 죽였어&quot;. 이 말은 들은 관객들은 웃는 대신 당황한다. 헨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앤을 너무 세게 간지럽히는 바람에 그녀가 웃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헨리가 앤을 간지럽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여기서 앤은 오럴 섹스 때와 마찬가지로 헨리의 코미디를 위한 대상으로 취급된다. 헨리는 자신의 뮤즈에 반항하기 위해, 혹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영화라는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앤을 향한 조소를 넘어 그녀를 직접 살해한다. 자신의 세계, 코미디의 세계를 상징하는 웃음으로 오페라를 살해하는 헨리. 더 강렬한 조소. 더 격렬한 저항. 이 코미디를 보고 관객들이 분노하며 야유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뮤즈를 모욕했기 때문이 아닌 오페라 배우로서 앤의 정체성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배우의 일. 관객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일. 끊임없이 타자의 삶을 체화하는 일. 그런 앤을 헨리는 웃음을 통해 살해함으로써 그녀를 자신의 세계 안에 복속시키고 동시에 타자가 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대신 죽어주는 여자의 죽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남자. 앤의 세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저항. 그러나 다시 한번. 여기는 앤이 신성한 뮤즈로 존재하는 앤의 세계이다. 헨리의 이러한 전복의 시도는 당연하게도 실패로 끝난다. 야유하는 관객들을 뒤로하고 나가는 헨리.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대를 빠져나갔지만 이윽고 다시 무대로 돌아와 관객과 싸운다. 뮤지컬을 하면서 말이다. 이때의 헨리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관객들을 지휘하는 코미디언이 아닌 그저 자신의 뮤지컬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 한 명의 배우에 불과하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이제 더 이상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드라이버는 이제부터 앤의 남편이라는 영화 속 배역을 인공적으로, 강박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완전히 앤의 세계로 종속된 헨리. 레오스 카락스는 이렇게 코미디언 헨리를, 영화 만드는 것을 경멸하는 자신의 자아를 조소한다. 이제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lt;br&gt;&lt;br&gt;5. 헨리는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방식, 코미디를 통한 저항이 아니다. 오히려 앤의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앤에게 저항한다. 헨리와 앤, 그리고 아네트는 함께 요트 여행을 떠난다. 한밤중 바다에 나왔을 때는 폭풍우가 요트를 집어삼킬 듯이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앤은 사라진 자신의 남편 헨리를 찾아 나선다. 갑판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헨리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상태이다. 그러더니 헨리는 갑자기 앤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앤은 빗속에 오래 있으면 자신의 목이 망가져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한다. 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지금 헨리가 원하는 것이다. 노래를 상실하는 것. 오페라 배우라는 자아를 상실하는 것. 그때 앤은 더 이상 관객을 대신해 죽을 수 있는 배우가 아닌 오직 헨리의 남편이라는 정체성만이 남게 된다. 헨리는 오페라처럼 앤과 빗속에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는 곧 그녀를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아마 이 장면에서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레오스 카락스가 경애해 마지않는 무르나우의 &amp;lt;선라이즈&amp;gt;를 떠올렸을 것이다. &amp;lt;선라이즈&amp;gt;에서 배를 타는 장면은 두 번 등장한다. 그리고 배를 타는 순간은 곧 죽음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한 번은 도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남자가 아내를 호수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거역하지 못하며 실패한다. 다른 한 번은 배가 폭풍우를 만나 뒤집히고 남자는 가까스로 살아 돌아오지만 아내는 찾지 못한다. 분노한 남자가 자신을 유혹한 도시 여자를 죽이려고 할 때 아내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다. &amp;lt;아네트&amp;gt;는 이 두 장면을 하나로 합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남편. &amp;lt;선라이즈&amp;gt;에서의 살인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르나우는 남자가 도덕적 경계선을 넘으려는 순간마다 그를 제지하면서 마지막에 일출을 선물한다. 그러나 &amp;lt;아네트&amp;gt;에서 헨리는 이 경계선을 넘어선다. 이 순간 헨리는 자신을 창조한 감독의 영화적 뮤즈와도 같은 &amp;lt;선라이즈&amp;gt;를 조소한다. 뒤틀린 뮤즈. 창조자에 대한 저항. 심연 안에서의 저항. 배우로서 죽음을 거듭하던 앤을 헨리는 실제로 죽이면서 더 깊은 심연으로 빠뜨린다. 죽음이라는 심연. 그리고 심연의 죽음. 그러나 심연 밑에는 언제나 더 깊은 심연이 남아있다. 앤은 죽었으나 헨리는 이전의 자유로운 코미디언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가 조소한 자신의 창조자, 레오스 카락스가 앤의 유령을 보낼 것이다. 도덕의 경계선을 넘은 대가는 언제나 유령이 되어 되찾아온다. 그리고 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딸 아네트에게 물려주며 그를 괴롭히겠다고 선언한다. 이제 인형 아네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목소리로 뮤지컬을 이어나가야 한다. 아네트는 언제 노래를 부르는가?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일 때.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이 홀로 빛날 때. 그때 아네트는 어머니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노래라는 명령. 배역이라는 운명. 앤의 뮤지컬은 그렇게 죽지 않고 헨리의 곁에 남아있게 된다. 딸의 뮤지컬을 보았을 때 헨리는 앤의 뮤지컬과 달리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딸의 기적에 매혹되어 지휘자 친구와 함께 아네트를 무대에 세우며 전 세계에 투어를 다닌다. 물론 이것이 아네트에 대한 착취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앤의 뮤지컬을 죽음이라고 조소하던 헨리가 이제는 자신의 딸 아네트를 죽이고 있다. 이건 단순히 돈이나 명성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헨리는 자신이 조소하던 뮤지컬에 매혹된 것이다. 그건 곧 자신의 조소가 실패로 끝났다는 의미이다. 코미디가 실패하자 더 강한 방식으로 뮤지컬을 조소하던 헨리의 눈앞에 아네트가 노래하는 기적이 나타나 그를 매혹시킨다. 마치 영화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헨리 앞에 영화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반박하는 것만 같은 레오스 카락스. 헨리가 조소하면 레오스 카락스는 더 강하게 그를 조소한다. 그 사이에서 봉제인형 아네트는 헨리와 앤, 그리고 레오스 카락스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런 아네트를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인물은 지휘자뿐이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투어 도중 헨리가 클럽에 갔을 때 지휘자가 아네트를 돌봐준다. 그때 지휘자는 헨리와 앤이 불렀던, 자신이 작곡한 노래 &quot;We love each other so much&quot;를 가르쳐 준다. 이건 아네트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명령에 따르는 인형이 아닌 한 명의 제자,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아네트는 어느 순간부터 헨리 대신 지휘자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헨리는 아네트가 자신과 앤의 노래 &quot;We love each other so much&quot;를 부르는 것을 목격하고 지휘자가 그 노래를 아네트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것은 지휘자가 아네트의 진짜 아버지이고 아네트를 지휘자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필이면 아네트의 소유권을 제기하는 사람이 지휘자이다. 어째서인지 지휘자라는 인물은 레오스 카락스의 또 다른 자아인 것만 같다(게다가 이 지휘자는 극 중에서 이름이 있지도 않다). 지휘자라는 자리. 헨리 자신이 코미디 무대에서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상실한 자리. 지금의 헨리는 감독이라는 지휘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배역에 불과하다. 그런 헨리에게 아네트의 친부라고 주장하는 지휘자가 나타나 아네트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아네트가 생물학적으로 누구의 딸인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레오스 카락스 본인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에 대한 묘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지휘자가 아네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곧 헨리 역시 아네트와 같은 마리오네트 인형이며 자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이다. 헨리가 자신과 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래가 사실은 지휘자가 작곡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마치 자신의 창조자를 만난 것만 같은 피조물. 이 순간 헨리는 이제껏 잊고 있던 자신의 자리를 깨닫게 된다. 뮤지컬 배역이라는 자리. 끊임없이 노래와 춤에 복속되어야 하는 운명. 아네트의 아버지로서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이를 잊어버린 헨리에게 레오스 카락스가 다시 상기시킨다. &quot;너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너의 운명이야&quot;.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앤을 죽인 것처럼 헨리는 한 번 더 살인을 저지른다. 앤이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지휘자를 수영장에 빠뜨려 죽이는 헨리. 여기에는 어떤 조소의 감정도 없다. 오로지 지휘자에 대한 경멸, 영화와 감독에 대한 경멸만이 헨리를 움직인다. 이 살인을 통해 지휘자와 동시에 코미디언 헨리 역시 죽는다. 더 이상 헨리의 살인은 코미디나 조소가 아니다. 헨리에게는 살인자라는 배역이 주어졌다. 그 모습을 아네트가 지켜보았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죽이는 현장. 영화를 경멸하는 자아는 영화를 사랑하는 씨네필로서의 자아와 영화를 지휘하는 감독으로서의 자아를 차례로 죽인다. 공존할 수 없는 자아들(그러고 보니 이 세 명의 자아는 오프닝 때를 제외하면 단 한순간도 한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렇게 헨리를 조소하면서 자신을 조소해 나간다. 이제 아네트의 마지막 공연만이 남아있다. &lt;br&gt;&lt;br&gt;6. 아네트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에서 노래를 거부한다. 그 대신 노래가 아닌 생생한 증언의 목소리로 아버지의 실체를 폭로한다. &quot;아빠는 사람들을 죽여요&quot;. 이건 비유도, 코미디도 아니다. 헨리는 말 그대로 살인자이다. 이 순간 봉제인형 아네트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는 딸. 이때 아네트의 증언은 인형이라는 자신의 운명과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헨리가 아네트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한 것은 아네트를 노래하는 인형이라는 배역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건 아네트가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 헨리 본인이 그토록 조소했던 죽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배역으로 남아있는 앤처럼 아기 아네트로 남기를 딸에게 강요하는 아버지. 딸이 평생 인형으로 남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폭력. 딸은 그것을 거부하며 한 명의 주체, 하나의 인격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헨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 살인자의 배역을 소화해야 한다. 앤을 죽이고 지휘자를 죽이고, 그리고 아네트의 자아를 죽이려고 한 살인자. 죽지 않기 위해 무대 위에서 자신을 죽였던 코미디언은 이제 죽지 않기 위해 살인을 한 죄로 감옥에 간다. 이건 곧 영화를 경멸하던 자아가 영화에 심취하며 발생한 비극이기도 하다. 그때 분열되어 있던 레오스 카락스의 자아는 헨리와 동일시된다. 영화에서 레오스 카락스가 자신의 자아를 부여했던 앤과 지휘자는 모두 영화에서 죽었다. 그렇기에 코미디언은 감독이 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자아는 영화를 경멸하더라도 영화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감독이라는 배역. 삶의 운명. 그러니 헨리를 심판하는 것은 레오스 카락스 자신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런 자신의 자아를 레오스 카락스가 심판할 때 가장 먼저 심판해야 할 죄목은 헨리가 영화를 경멸했다는 것이다. 헨리가 심문을 마치고 교도소에 수감될 때 그를 둘러싼 관중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quot;1급 살인이든 그 아래이든 그건 상관없어&quot;. 이 미묘한 문장. 이어지는 노래. &quot;우리의 종교였던 그녀는 이제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없어&quot;. 지금 관중들은 단순히 헨리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위해 죽어주던 배우, 앤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지휘자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헨리의 죄목은 1급 살인이 아닌 그 아래, 배우라는 앤의 자아를 살인한 죄가 될 것이다. 앤은 영화 속에서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있으나 오페라 배우는 아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레오스 카락스는 법정 장면에서 다시 한번 앤의 유령을 등장시킨다. 오페라를 경멸하던, 영화를 경멸하던 헨리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속에서 저항의 대가를 치른다. 시간이 흐른 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헨리에게 그의 딸 아네트가 면회를 온다. 헨리의 눈에는 아직 아네트가 봉제인형으로 보인다. 그런 아네트에게 헨리가 말을 건다. &quot;많이 변했구나, 아네트&quot;. 그때 화면 밖에서 인간이 된 아네트가 대답한다. &quot;응. 변했어&quot;. 그제야 헨리는 인형이 아닌 인간 아네트를 마주한다. 이어지는 쇼트. 후경에 있던 인간 아네트는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 아네트와 나란히 프레임에 담긴다. 그리고는 인형을 의자에서 치우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다. 이제 아버지가 바라보는, 눈에 담고자 하는 인형 아네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딸이 침묵을 깨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quot;아빠도 변했어. 그래도 여기 있으면 안전하잖아?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우고 그렇지?&quot; 아버지가 대답한다. &quot;그래, 맞아&quot;. 딸이 한 번 더 묻는다. &quot;여기서는 사람도 못 죽이고 그치? 농담이었어&quot;. 아버지처럼 코미디를 해보는 딸. 자유롭게 연기했던 자신의 과거를 보는 헨리. &quot;근데 아빠는 이제 사랑할 게 없잖아?&quot; 아네트가 말한다. 왜 없는가? 영화를 찍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묻는다. &quot;널 사랑하면 안 돼?&quot; 딸의 단호한 대답. &quot;안 돼&quot;. 아네트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은 자신이 아닌 봉제인형 아네트라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아네트가 헨리를 찾아온 것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금 헨리가 감옥에 있는 것은 앤을 죽인 죄이다. 영화를 경멸한 죄. 하지만 아네트를 죽이려고 한, 아네트를 영원히 인형으로 봉인하고자 한 것에 대한 죗값은 치르지 않은 상황이다. 아네트는 그 죄에 대한 판결을 위해 온 것이다. 헨리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변론한다. 자신은 심연을 보지 않고자 했으나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심연을 보았다고 말한다.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말하는 헨리. 그러자 아네트가 노래하기를 자신은 노래하지 않기 위해 불빛을 피해 다닌다고 말하며 노래를 해야만 했던 과거를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노래하도록 만든 아버지 헨리와 어머니 앤을 비난한다. 돈을 벌기 위해, 복수를 위해 자신을 이용한 아버지와 어머니. 헨리는 앤을 감싸지만 아네트는 둘 다 사라지면 좋겠다고 저주한다. 노래하는 동안 헨리와 아네트의 노래는 화합하지 못한다. 둘은 그저 각자의 노래를 부를 뿐이다.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헨리.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난하는 딸. 떠날 시간이 되자 아네트가 한 번 더 헨리에게 말한다. &quot;아빠는 사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quot; 헨리도 아네트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quot;절대 저 아래 심연을 보면 안 돼.&quot; 그리고 아네트는 떠난다. 카메라는 면회실에 갇혀 떠나가는 딸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헨리를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바라본다. 이건 아네트에게 지은 죄에 대한 아네트의 심판이다. 영원한 작별.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겠다는 딸. 이 심판은 앤에게 지은 죄인 영화를 경멸한 죄가 아닌 영화를 찍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 죽인 자아에 대한 죗값. &quot;영화감독은 살인자&quot;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레오스 카락스. 아네트의 이러한 심판을 통해 영화 내내 헨리를 향했던 레오스 카락스의 조소는 결국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영화를 찍어야만 하는 비극. 그 운명에 대한 자학. 그래서인지 심연을 보지 말라는 헨리의 마지막 당부는 마치 자신의 딸에게 건네는 메시지인 것만 같다. &quot;너는 절대 영화를 찍지 마렴.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찍어야 해서 미안하구나.&quot; 아마도 오프닝에서 그가 자신의 딸 나스탸를 출연시킨 건 이 말을 전해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네트가 떠나고 카메라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구도에서 헨리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헨리가, 혹은 아담 드라이버가 카메라를 노려보며 말한다. &quot;그만 쳐다봐.&quot; 헨리의 마지막 저항. 더 이상 찍히지 않겠다는 선언. 배우가 자신의 배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영화는 끝나야 한다. 헨리는, 아니 아담 드라이버는 마치 카메라로부터 도망치듯이 구석에서 벽을 보며 얼굴을 숨긴다. &amp;lt;아네트&amp;gt;가 끝날 때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아네트 인형을 보여주고 끝난다. 영화의 조소. 카메라의 조소. 영화라는 운명. 감독이라는 운명. 배우라는 운명. 레오스 카락스는 마지막으로 이 모든 운명에 대해 조소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 짓궂은 엔딩. 영화에 대한 경외로 시작한 영화는 영화를 찍는 자신에 대한 조소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화면에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숲에서 행진하며 나온다. 함께 영화를 찍어준, 그리고 기다려준 모든 이들에 대한 작은 제의(祭儀). 행진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quot;끝났어요. 그래서 말씀드려요. 잘 가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낯선 사람을 조심하고, 좋은 관람이었다면 친구에게 말하세요. 친구가 없거든 낯선 이에게 말하세요. 오늘 밤 모두 잘 자요.&quot; 작별 인사를 건네는 &amp;lt;아네트&amp;gt;. 레오스 카락스는 죽음으로 가득 찬 영화에게도 생명력이 있다면 그건 극장 바깥에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생겨난다고 믿는 것만 같다. 나는 &amp;lt;아네트&amp;gt;와의 만남을 나의 친구에게,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아마도 그것이 레오스 카락스를 위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어준 배우들을 위한, 그리고 &amp;lt;아네트&amp;gt;를 만든 모든 이들에 대한 나의 가장 큰 헌사가 될 것이다. &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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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아네트</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영화비평</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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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Aug 2022 15:30: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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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선의 삶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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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0. 시작하기 전 당부의 말. 언제나 그렇듯이 이 글에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대부분의 장면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읽기 전 먼저 이우정의 &amp;lt;최선의 삶&amp;gt;을 감상하기를 추천드린다. 또한 나는 아직 임솔아 작가가 쓴 동명의 원작을 읽지 못한 상태이다. 아쉽게도 두 작품을 비교하는 파트는 이 글에는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글의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다.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생략하기도 하고 순화하기도 했지만 어떤 대사들만큼은 다른 언어로 대체할 때 그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와 여운을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그표편 그대로 글에 담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글을 읽는 도중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lt;br&gt;&lt;br&gt;1. 영화는 뒤돌아보며 시작한다. 기차 안에서 졸고 있는 강이. 그런 강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플래시백. 우리는 아직 이 기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졸음에 고개를 떨군 강이의 얼굴은 상당히 지쳐있는 모습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이 이야기의 끝부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이 프롤로그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필연적으로 왜 이 지점이 영화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오프닝의 앞과 뒤의 차이. 말해야 할 이야기와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영화에서 이 장면이 다시 나오는 순간은 강이가 아람이를 떠나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강이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은 이 순간이 처음이 아니다. 이 쇼트에서의 강이에게는 이미 수많은 사건들이 쌓인 상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 장면이 서사의 전환점이 될 때 이 선택이 지니는 다른 선택과의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이가 이 선택의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프롤로그가 끝난 후 강이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quot;그때는 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던 시절이었다&quot;. 폭력과 권위의 시대. 학생으로서, 그리고 여학생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부조리들. 영화는 그 당시 자료 화면들을 푸티지로 보여주며 그 시대상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이것이 강이의 일탈에 대한 강이 스스로의, 혹은 이우정의 합리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시대의 반작용(혹은 부작용)으로 나오게 된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강이는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quot;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quot;. 덩어리와 개인. 강이와 소영, 그리고 아람은 분명 덩어리이기 이전에 각각의 개인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덩어리처럼 뭉쳐 다닌다. 무엇이 이들을 뭉치게 만드는가? 한국이라는 사회. 학교라는 사회. 그 사회의 억압과 폭력. 소녀들은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분명한 목표 앞에 소녀 개인의 신분이나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회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이들은 덩어리로서 뭉쳐다닐 수 있다. 이때 이 덩어리를 뭉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쪽은 언제나 소영이다. 강이의 말. &quot;소영이 개입하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quot;. 어째서? 소영이 강이, 아람과 다른 결정적인 한 가지. 계급의 차이. 가난한 강이와 아람과 달리 소영은 부잣집 딸이다. 선생님들이 소영을 아끼는 것도 이 덩어리에서 유일하게 소영이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소영은 자신의 계급적 배경을 이용해 일탈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먹질도 정당방위가 되고 2주일의 징계도 1주일로 줄일 수 있다. 여기서 강이와 아람은 소영에게 덩어리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탈을 함께 할 또 다른 개인들. 부르주아를 위한 서민.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왜 꼭 덩어리를 이루어야 하나요? 대답은 단순하다. 소영에게는 자신의 일탈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존재가 필요하다. 소영 개인의 일탈은 소영의 문제가 되지만 소영과 덩어리의 일탈은 덩어리의 문제가 되고 그때 책임은 하층민인 강이와 아람에게 넘어간다. 뒤집어 말하면 강이와 아람 역시 일탈의 대한 책임을 소영 덕분에 덜 수 있다. 두 계급의 상생. 이 상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덩어리라는 집단. 사회 바깥의 사회. 강이는 이 덩어리라는 사회의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 어떤 규칙? 소영이 정하는 규칙. 부르주아가 정한 규칙. 그런 소영이 어느 날 강이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신이 가출을 할 예정이니 함께 가출하자는 내용의 문자. 강이는 문자를 본 후 말한다. &quot;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quot; 이건 무슨 의미인가? 강이는 문자를 보기 직전 아버지에게 집이 작다며 한탄을 한다. 가난에 대한 탄식. 계급에 대한 절망. 강이는 이 절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탈을 하는 것이다. 그런 강이에게 부잣집 딸인 소영의 문자는 일종의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질 것이다. 강이는 그렇게 덩어리와 함께 집을 나온다. &lt;br&gt;&lt;br&gt;2. 집을 나온 소녀들은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떠돈다. 그런 소녀들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남자는 세 소녀들에게 먹을 것을 사먹으라며 용돈을 주고 자신이 운영하는 스티커사진 가게에서 사진도 찍게 해준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바다로 가서 빙수 가게를 차리자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무언가 불안한 호의.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자본을 소유한 남자와 노동을 요구받는 소녀들. 그리고 성인 남자와 여학생이라는 관계. 비대칭적인 경제 권력과 젠더 권력. 언제 저 남자가 소녀들에 대한 태도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 다시 한번. 지금은 &quot;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quot;는 시절이다. 그러한 폭력이 사회 바깥이라고 없으란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 남자의 진짜 의도를 아직까지는 알지 못한다. 남자의 제안을 받은 뒤 아람과 소영은 따로 나가 놀고 강이는 남자와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다. 남자는 이름을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강이의 이름을 수첩에 적는다. 이름이라는 표상. 집단 사이로 새어나오는 개인의 표상. 이 순간 강이는 남자와 덩어리의 일부가 아닌 한 명의 주체로서 마주하고자 한다. 덩어리에서 분리된 개인.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강이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서도 남자와 강이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는 유지된다. 남자와 강이가 주체 대 주체로서 마주하지 않는 이상 강이는 계속 덩어리의 일부에만 종속된다. 집단 속의 개인. 그때 강이의 이름은 하나의 주체에 대한 표상이 아닌 덩어리를 대표하는 표상으로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이 드러난다. 남자의 집에서 자던 중 소영은 남자의 이상한 손길을 느낀다. 영화는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소영은 분명 그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여기서 남자의 위선은 확실히 나타난다. 어떤 위선? 남자는 타자의 영역에 있는 소녀들을 제도와 질서 안으로 구원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시대는 &quot;몰상식과 폭력이 노을처럼 붉게 불타&quot;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여학생으로서 겪어야 했던 부조리들을 강이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 그러니까 남자의 위선은 곧 제도와 질서의 위선이며 시대의 위선이다. 이때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가 소영을 성적으로 추행하는 장면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가? 왜 굳이 관객이 그 장면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드는가? 이 장면에서 이우정의 관심은 단순히 그 위선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다. 소녀들은 제도와 질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덩어리를 이루어 집 바깥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폭력을 집 밖에서도 똑같이 경험한다. 여기서 소녀들은 거대한 절망을 마주한다. 어떤 절망?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 지금 속한 제도와 질서를 벗어나도 폭력은 어디에나 편재한다는 절망. 그래서 소녀들은 다시 도망친다. 도망치기 전 아람은 (강이의 설명처럼)남자의 지갑을 훔친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아람이는 그저 덩어리의 일부로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안 후 소녀들을 뒤쫓는다. 그리고 소녀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남자는 곧장 강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이는 남자가 소녀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강이는 지금 남자에게 있어 덩어리를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강이는 자연스럽게 덩어리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마치 소영이 자신의 책임을 떠넘길 존재가 필요하듯이. 그리고 남자와 다시 마주하자 강이는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 순간 강이는 덩어리의 일부로서 자신이 아닌 이강이라는 소녀 자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는 덩어리가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나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일 뿐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세요. 울면서 호소하는 소녀. 남자는 이때 비로소 자신이 적은 이름의 뜻을 알게 된다. 덩어리의 표상이 아닌 주체의 표상. 그 표상을 보자마자 남자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이 소녀를 떠나보낸다. 이제 다시 소녀들은 방황해야 한다. 이 시대의 공간에는 소녀들을 위한 곳이 없다. 소녀들에게는 점차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떠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거나.&lt;br&gt;&lt;br&gt;3. 소영은 강이에게 뜬끔없는 질문을 던진다. &quot;넌 꿈이 뭐야?&quot; 강이는 대답을 회피하고 소영에게 이 질문을 되묻는다. 소영의 꿈은 슈퍼모델이 된 후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두 인물이 아파트 복도에서 이 대화를 나눌 때 1층에서 아람은 자신들의 몸을 맡길 매트리스를 들고 나타난다. 강이와 소영은 위에서 아람을 내려다본다. 하나의 분리. 어떤 분리? 계급이라는 분리. 미래와 이상을 말하는 부르주아와 당장의 생존을 선택하는 하층민 사이의 장벽. 그리고 그 경계에 속한 강이. 누군가는 아람을 내려다보는 강이와 소영의 시점 쇼트에서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체육 시간에 꾀병으로 교실로 도망쳐 온 강이와 소영은 운동장에 있는 아람과 눈을 마주친다. 같은 구도. 그러나 다른 시선. 첫 번째 시점 쇼트가 세 소녀를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게 해주는 결집의 쇼트였다면 두 번째 쇼트는 덩어리 안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간극의 쇼트이다. 물론 이 쇼트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소녀들이 이전에 만난 남자를 통해 덩어리로 살아갈 수 없다는 좌절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덩어리는 그때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건 아람과 소영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영은 자신의 꿈을 위해 모델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때의 소영은 물론 덩어리에 소속된, 제도와 질서 바깥의 소영이다. 폭력으로 가득 찬 학교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소영.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이 소녀를, 이 덩어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소영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콘테스트를 마친 후 소녀들은 자신들과 같이 집 밖을 떠돌아다니는 또다른 남자 덩어리와 어울려 논다. 오락실에서 놀던 중 아람은 무리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얼굴이 엉망이 된 채 다시 나타난다. 아람의 말에 따르면 같이 놀던 남자들이 자신이 벗을 때까지 때렸다고 한다. 여기서 아람이 겪는 폭력은 이전에 학교와 사회에서 당한 폭력과는 다른 것이다. 학교에서의 폭력이 여학생의 신분으로 당해야 하는 폭력이라면 이때의 폭력은 여자인 동시에 하층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폭력이다. 게다가 그런 폭력에서 조금이나마 자신을 보호해주던 제도와 질서를 아람은 스스로 버렸다. 그것을 아는 듯이 그날 밤 아람은 자신을 때린 그 남자와 다시 만나러 나간다. 강이가 걱정하자 아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quot;어떻게 다 좋을 수 있냐?&quot; 좋지 않은 것까지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 하층민의 비극. 아람은 이 운명을 스스로 체화한 것처럼 강이에게 말한다. &quot;어린 것아. 사랑하면 싸우는 거야&quot;. 여기서는 이 비상식적인 변명을 폭력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아람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이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렇기에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렇게라도 합리화하고자 한다. 두 가지 극단. 부르주아의 길과 하층민의 길. 강이는 이 사이에 속해 있다. 그때까지 강이는 소영의 곁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소영의 곁에 있으면서도 계속 아람을 상기시키고 걱정한다. 말하자면 강이는 이 덩어리를 유지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소영과 아람은 이미 갈라진 상황이다. 강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덩어리는 머지않아 해체될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이 덩어리가 해체되는가에 있다. 소영은 모델 콘테스트에서 떨어진 것을 알게 된 후 실망스럽게 걸어간다. 그런 소영에게 강이는 &quot;아람이는 괜찮을까?&quot;라고 물으며 다시 한번 아람이를 상기시킨다. 그러자 소영이 대답한다. &quot;불결해. 진짜 더럽지않냐?&quot; 언뜻보면 이 말은 남자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아람에 대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을 한 바로 다음 강이는 소영의 바지에 묻은 피를 발견한다. 여학생의 몸으로서 흘릴 수밖에 없는 피. 이때 중요한 것은 지금 소영에게는 생리대가 없다는 것이다. 소영은 지금 자신이 가장 기본적인 몸의 욕구조차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앞에서 아람을 힐난하듯이 한 말은 사실 그런 아람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다.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덩어리 사이의 균열을 더욱 명백하게 알게 된다. 처음 소녀들이 덩어리로 집 밖에 나왔을 때 거기에는 계급적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와 사회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연대만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 바깥에서도 편재하는 폭력을 마주한 후 소녀들 사이의 계급적인 간극이 명확해지고 둘 사이는 분열된다. 강이는 소영의 바지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자 소영은 자신의 카드를 주며 새 바지를 사오라고 한다. 이제 민주적으로 보였던 소녀들의 관계는 경제 권력을 기반으로 비대칭적으로 변한다. 소영은 덩어리에게 집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 집조차도 소영 본인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 집에 아람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온다. 소영은 당장 내쫓으라고 말하지만 아람은 그 고양이가 아프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소영은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라고 하지만 아람은 고양이가 안락사될 것이라며 다시 한번 거부한다. 여기서 고양이가 덩어리의 메타포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영은 이 고양이를 제도와 질서로 회귀시키고자 하고 아람은 그 안으로 회귀하는 순간 고양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사실상 소영은 덩어리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람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또다른 폭력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당하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남자들과 어울리며 돈을 벌고자 한다. 그래야만 돈을 벌어 이 덩어리를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덩어리에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람이 아닌 소영이다. 소영이 마음만 먹으면 덩어리는 곧장 해체될 수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른들이 구축한 제도와 질서로부터 도피한 소녀들의 세계에는 이제 어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가 작동한다.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의 생성. 소녀들이 밖으로 나온 이후 강이는 계속해서 소영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준다. 그리고 아람은 자신만의 노동을 이어간다. 여기에 경제권력을 쥐고 있는 소영까지.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 어른의 논리가 덩어리를 지배하는 이상 소녀들의 세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때 이 과정을 왜재하는 제도와 질서가 덩어리에 침입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다시 기억해보자. 소녀들이 집을 나오기 이전부터 소녀들 사이에는 계급의 논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소영에게 있어 덩어리는 그저 자신의 일탈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소영이 토대를 만들고 강이와 아람은 덩어리에 들어간 대가로 감면된 처벌을 받는다. 전형적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거래 관계. 소녀들이 마주하는 또다른 절망. 도피하고자 했던 세계의 논리가 사실 자신들의 세계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절망. 이건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이 세계에는 없다는 절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 절망을 마주하는 순간 소녀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실체가 사실 지금 살고 있던 세계의 답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완벽한 절망. 더 이상 소녀들이 도피할 곳은 없다. 이제 오로지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있다. 단지 언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에 달려있을 뿐이다.&lt;br&gt;&lt;br&gt;4.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단순히 이상한 걸 넘어 서사의 논리를 비약하는 듯한 장면. 그래서 갑자기 영화에 침입하는 것만 같은 장면. 강이와 소영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름밤의 매서운 더위가 두 소녀를 괴롭히고 있다. 잠을 자던 강이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 입 먹는다. 그때 더위에 지친 소영이 일어나 상의를 벗는다. 강이는 이 모습을 뒤에서 몰래 지켜본다. 이때부터 두 소녀 사이에 이상한 성적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굳이 이상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전까지 영화가 두 소녀에 대해 어떠한 성적인 묘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이는 소영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여준다. 그리고 다시 자려고 하는 순간 소영이 말한다. &quot;너도 벗어&quot;. 옷을 벗은 채 누워 있는 두 소녀. 여기서 두 소녀가 옷을 벗도록 한 것은 더위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위를 식혀줄만한 경제력의 부재. 그러니까 이 장면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은 두 소녀 사이의 성적 욕망이 아닌 소녀들이 처한 계급적 상황이다. 영화는 이때까지만 해도 명백하게 계급적 텍스트를 따라 진행된다. 옆으로 누운 강이의 시선에는 소영의 뒷모습이 보인다. 강이는 그대로 잠이 든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강이는 소영과 눈을 마주친다. 이때 은연 중에 흐르던 두 소녀의 성적 긴장감은 현실화되고 영화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뀐다. 서로의 몸을 만지는 소녀들. 이윽고 이어지는 입맞춤까지. 카메라는 이 움직임들을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다. 이 순간 이제까지 서사를 이끌던 계급적 맥락은 한순간 성적인 맥락으로 비약한다. 하지만 &amp;lt;최선의 삶&amp;gt;은 퀴어 영화가 아니다. 이우정은 이 장면을 마치 꿈처럼, 영화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찍었다. 왜 이 장면이 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무엇이 이전까지의 계급적 맥락을 성적인 맥락으로 비약하도록 만들었는가? 지금 소녀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이들의 경제력은 어른들의 사회에서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들을 덩어리로 뭉치게 만들어 주던 이상마저 무너진 상황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들의 육체뿐이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통해 일하는 아람처럼. 강이와 소영은 바로 이 육체에 매혹된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전부. 지금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 이를 통해 강이와 소영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계급적 절망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통해 서사의 맥락 역시 단숨에 바뀌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강이와 소영의 욕망은 곧 자신을 타자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건 영화의 시작부터 그랬다. 소녀들이 가고자 하는 자리. 가출 청소년이라는 타자의 자리. 사회 바깥에 있는, 제도와 질서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리. 그러나 그 욕망을 쫓아 온 현재 소녀들은 그 욕망의 실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강이와 소영은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육체를 통해서라도 그 욕망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다. 성소수자라는 타자. 그 타자의 자리에 대한 향유.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욕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은 뒤 소영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아람에게는 악의적일지라도 강이와는 가깝게 지내던 소영은 이제 강이 역시 악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이유를 물어보는 강이에게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는다. 서로의 몸을 만진 손. 그러다 갑자기 강이에게 소리친다. &quot;씨발!&quot; 소영은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소녀들은 이제 바닥까지 떨어졌다. 욕망하는 자리에 갔으나 욕망하는 대상은 거기에 없다. 그 악순환의 반복과 함께 이어지는 전락. 소영은 이 지긋지긋한 전락에 지쳤다.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영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싼다. 자본의 후퇴. 그건 강이와 아람 역시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덩어리는 무너진다. 집으로 돌아온 강이. 여기서 관객은 두 가지 기대를 품을 수 있다. 소영의 부모처럼 딸의 모든 과오를 품어주는 포용적인 부모. 혹은 아람의 부모처럼 딸의 일탈을 폭력적으로 꾸짖고 질책하는 강압적인 부모. 하지만 강이의 부모는 이 두 가지 기대에서 모두 벗어난다. 강이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온 강이를 아주 담담하게 맞이한다. 그리고는 강이를 정화하듯이 나뭇가지로 몸을 털어내고 불상 앞에서 감사기도를 한다. 무언가 어색한 거리. 강압적이지도 친밀하지도 않은 듯한 거리. 이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돌아온 딸에게 꽃을 선물하는 아버지. 그리고 딸에게 말한다. &quot;사랑한다 강이야&quot;. 다시 함께 앉은 밥상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고기를 잔뜩 올려주며 딸의 귀가를 반겨준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묻는다. &quot;좋니?&quot; 강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quot;다행이다&quot;라고 대답한다. 분명히 아버지는 딸을 환대했음에도 어째서인지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이 거리 안에서 딸은 무엇을 느끼는가? 분명 가족 구성원의 일부로서 환영 받았으나 동시에 그 안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애매한 자리. 이건 강이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속한 위치 그대로이다. 사회 구성원의 일부, 학교 구성원인 학생이라는 신분, 그러나 그 안에서 가출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는 타자. 강이가 가족에게 바란 것은 자신을 포용적으로 대하든 강압적으로 대하든 완전한 가족 구성원 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이의 부모가 딸과 거리를 두는 것은 딸 스스로가 그 거리를 극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강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가정에 가출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평화로운 가정에는 가출 청소년이라는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강이의 부모가 환대한 존재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딸이지 불량한 가출 청소년이 아니다. 그러니 딸이 가정에 환영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덩어리의 부산물을 털어버리고 평범한 가정의 딸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부모와 딸 사이에서 생기는 거리감은 오로지 딸의 몫이다. 타자와의 거리. 타자로서 겪어야 하는 거리감. 이 외로운 싸움. 누구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비정한 현실. 하지만 아직 더 큰 절망이 남아있다. 청산되지 않은 관계. 떠나갔던 덩어리와의 재회. 덩어리 바깥에서 만나는 소영과 아람. 이건 강이의 상상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lt;br&gt;&lt;br&gt;5. 학교에서 만난 소영은 이미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다. 이제 소영에게 강이와 아람은 안중에도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청산해야 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그러니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소영의 태도는 더욱 악의적으로 변한다. 여기서도 덩어리의 작동 방식은 그대로 나타난다.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짊어질 존재. 이 덩어리와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소영은 이제 적극적으로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다. 그것을 선언하듯이 소영은 강이에게 말한다. &quot;그날은 더워서 우리가 미쳤던거야. 그러니까 정신차리자&quot;. 자신의 몸에서 덩어리를 지워나가는 소영.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다는 것은 자신을 도피하도록 만들었던 폭력과 권위 역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폭력은 소영과 아람에게 향한다. 자신의 비싼 립스틱을 자랑하면서 강이에게 폭력적으로 바르고 술집에서 일하던 아람을 힐난하면서 소영은 이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계급의 폭력. 소영은 이제 제도와 질서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해도 용인되는 부르주아. 그 사실을 강이와 아람에게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이 현실을 마주했을 때 두 소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람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갈뿐이다. 이미 하층민의 길에 익숙해진 이상 부르주아의 방식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그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강이이다. 커져가는 간극. 그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강이. 끝까지 덩어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이. 학교 운동장에서 강이는 아람에게 묻는다. &quot;우리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힘들겠지?&quot; 왜 이토록 강이는 덩어리에 집착하는가? 우리는 강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타자. 학교는 여전히 폭력과 권위로 가득 차 있고 가족마저 자신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주던,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곳이라고 믿었던 덩어리마저 계급의 논리로 해체되었다(물론 아직 강이는 이미 어른들의 논리가 덩어리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강이는 이 덩어리가 계급의 논리를 뛰어넘고 다시 복원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온전히 자유로운 세계. 오로지 소녀들만을 위해 세계. 그 세계에 대한 갈망. 이 말을 들은 아람이 말한다. &quot;내가 알아서 할게&quot;. 무엇을 한다는 것일까? 다음 날 소영이 강이와 아람에게 함께 오락실에 가자고 제안한다. 불길한 제안.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된다. 오락실에서 소영은 강이를 노래방 부스 안으로 부른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낸다. &quot;너 왜 우리 이간질해?&quot; 강이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도 이해할 수 없다. 이우정은 소영과 아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장면을 더 따라가보자. 어리둥절하게 있는 강이에게 소영이 말한다. &quot;주제에. 읍내동 사는 주제에&quot;. 그리고는 소영이 강이를 때리더니 두 소녀는 싸우기 시작한다. 이때 이우정은 갑자기 cctv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바라본다. 노래방 부스 안에서 싸우는 강이와 소영. 이 모습을 오락실 주인이 cctv를 통해 본 뒤 찾아오자 소녀들은 급하게 도망간다. 물론 이우정은 이미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논픽션의 시선을 개입시켰다. 하지만 첫 장면의 자료 화면들은 서사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방식이었던 것에 비해 이 장면에서 시선의 변화는 서사 안에서 갑자기 이루어진다. 여기서 이우정은 마치 시선에 대한 주도권을 오락실 주인에게 넘긴 것만 같다. 어째서? 이우정의 시선과 cctv 시선의 차이. 이우정은 지금 벌어지는 폭력이 계급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락실 주인에게 이 싸움은 그저 불량한 청소년들이 일으키는 소란에 불과하다. 시선의 간극. 오락실 주인의 시선은 곧 이 소녀들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이다(이우정은 &amp;lt;최선의 삶&amp;gt;에서 한국사회의 시선을 성인 남자의 시선으로 환유한다. 이전의 스티커사진 가게 사장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이 간극 사이에서 무엇이 나타나는가? 한국사회는 이 소녀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소녀들 사이에서 강이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금 강이에게는 이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줄 어른의 존재가 없다. 강이의 부모도, 학교 선생님들도 강이를 구해주지 못한다. 아니 구해줄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이 소녀는 그저 덩어리의 일부, 불량한 청소년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표류하는 강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이는 아람에게 소영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아람의 대답. &quot;난 그냥 네가 시키는대로 했지&quot;. 강이가 시킨 일? 강이는 아람에게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했을 뿐이다. 이어지는 아람의 말에 따르면 소영은 아람에게 대뜸 미안하다고 말한 뒤 계란찜을 선물했고 아람은 그것으로 마음이 풀렸다고 말한다. 아람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혹은 (소영의 표현대로 말하자면)어떤 이간질을 한 것일까? 아람이 들어주려 한 강이의 부탁. 다시 예전의 자유로운 덩어리로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소영이 다시 강이와 아람에게 돌아와야 한다. 이때 소녀들 사이의 집합관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아람과 소영이 만났을 때 아람은 강이와 이룬 덩어리를 대표해서 소영을 만나는 것이다. 이 덩어리 입장에서 소영은 타자로서 마주한다. 이걸 소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람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은 아람을 덩어리의 일부로 끌어들인 강이의 존재이다. 소영에게 있어 강이, 아람과 함께 이루었던 덩어리는 청산해야할 과거에 불과하다. 그 덩어리를 지우기 위해서는 세 소녀가 더 이상 덩어리의 일부가 아닌 각각의 개별적 주체들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강이는 지금 그 덩어리를 다시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덩어리의 표상.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 이 만남에서 아람의 정체성은 덩어리의 아람과 주체로서의 아람으로 분리된다. 그러니 소영이 계란찜을 선물하며 미안하다고 말한 아람은 강이가 데려다 놓은 덩어리의 아람이 아닌 더 이상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학생의 아람이다(실제로 이 장면 이후 소영과 아람은 한 번도 대면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람은 곧바로 강이를 버리고 평범한 여학생으로서 소영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분열되는 정체성. 소영이 말하는 강이의 이간질. 소영은 자신 앞에 덩어리의 아람을 보낸 강이에게 분노한 것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 그 과거를 억압하기 위한 폭력. 하지만 과거의 유령은 억압하면 할수록 더 명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회귀와 억압. 그 폭력의 악순환. 이우정은 그 다음 시퀀스에서 그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쉬는 시간 도중 소영이 강이에게 다가와 방과후에 만나자고 말한다. 그런 강이에게 아람이 문자를 보낸다. &quot;강이야, 지면 안돼. 지면 끝이야 알지? 맞는거 봤지?&quot; 여기서 중요한 건 아람이 강이의 편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아람은 지금 덩어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강이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홀로 남은 강이. 고독한 소녀. 그 후 영화는 학교 뒤편에서 홀로 서성이며 소영을 기다리는 강이를 멀리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지켜본다. 이 고독한 소녀는 대걸레 막대를 바닥에 내리 찍으며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프레임에는 오직 그녀를 둘러싼 여백만이 소녀의 숨통을 조이는 듯이 남아있다. 도래하고야 말 순간에 대한 불안. 그리고 다음 장면. 강이의 얼굴에는 이미 소영에게 당한 폭력의 상처가 남아있다. 강이는 어느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져 있다. 이어서 소영의 목소리가 나온다. &quot;난 이제 이강이랑 못 논다. 선택해. 나야? 이강이야?&quot; 확실하게 선언하는 소영. 이우정은 오락실에서의 장면과 달리 폭력의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공터에 외로이 앉아있는 강이를 롱쇼트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녀의 고독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강이가 의지할 덩어리를 없다. 소영이 덩어리를 버리고, 아람조차도 덩어리를 떠났다. 이 외로운 상황에서 소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lt;br&gt;&lt;br&gt;6.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망설이던 강이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밥솥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모에게 강이는 나지막이 말한다. &quot;도와주세요&quot;. 마치 그동안 못 먹었던 밥을 몰아서 먹는 것만 같은 딸. 그러면서 강이는 덩어리의 자신을 속죄하며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주기를 부모에게 간청한다. 다음 날 강이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학교에 찾아간다. 교무실에는 그동안 학교의 타자로 떠돌아 다니던, 강이와 아람, 소영을 포함한 수많은 덩어리들이 모여있다. 강이는 여기에 왜 왔는가?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당했던 폭력의 실체를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나와있다. 더 이상 사회 바깥에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사회와 동화되고자 하는 움직임. 소영과 같은 선택. 그러나 선생님들은 강이를 구원해 줄 생각이 없다. 선생님은 상처로 가득한 강이의 얼굴을 앞에 두고도 소녀를 질책하기에 바쁘다. 그들의 눈에 강이는 그저 제도와 질서 바깥을 떠돌아 다니는 덩어리에 불과하고 그녀가 당한 폭력은 단지 불량한 청소년들끼리의 싸움에 그치지 않는다. 강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또다시 마주한다. 한국사회의 민낯. 어른들의 부조리. 부르주아인 소영과 달리 모든 질책이 자신에게 넘어오는 절망. 학교와 어른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강이를 환대해주지 않는다. 그런 강이에게 아람이 제안을 한다. &quot;같이 가자&quot;. 어디로? 다시 한번 서울로. 하지만 이번 여정은 다르다. 이번에는 자본을 소유한 소영 없이 하층민인 강이와 아람 단 둘이서만 떠나야 한다. 이 새로운 덩어리에서의 주권은 노동을 할 수 있는, 해본 경험이 있는 아람이 지니고 있다. 노동이라는 자본. 하지만 소녀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은 자신의 육체를 통한 노동 뿐이다. 성적인 육체. 아람은 이미 익숙한 이 노동에 강이는 경멸을 표한다. 그건 단순히 술집에서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난 강이에게 아람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농담을 하고는 배에서 수박을 꺼낸다. 수박을 자를 방법을 고민하던 아람은 강이의 가방에서 식칼을 꺼낸다. 그러면서 말한다. &quot;칼은 누굴 죽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보호하려고 있는 거지&quot;. 우리는 강이가 이 칼을 처음 꺼낸 순간부터 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소영을 향하는 칼. 그 칼을 아람은 수박을 자르기 위해 사용한다. 강이는 이 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때의 수박은 단순히 아람의 성적 농담을 위한 대상을 넘어 아람의 세계에 대한 환유로서 작용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수박을 아람이 강이의 칼로 자르고 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아람은 지금 강이의 칼에 담긴 의미를 바꾸며 동시에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아람의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성적으로 공격하려 오는 대상에게 자신의 육체를 내주어야 한다. 칼로 수박을 자르듯, 자기 자신을 해쳐야만 하는 세계. 그건 강이가 꿈꾸는 덩어리가 아니다. 이 절망을 마주한 강이는 아람의 덩어리를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장면으로 돌아온다. 강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두 번째 귀가. 이 귀가는 첫 번째와 어떻게 다른가? 첫 귀가에서 덩어리가 강이를 떠났다면 이번에는 강이가 덩어리를 떠난다. 예전의 자유롭고 행복했던 덩어리를 복원시키고자 했던 강이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제 강이는 집 바깥에는 자신을 위한 덩어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는 이제서야 기차에 앉아있는 강이의 곁에는 왜 아무도 없는지, 강이의 지친 얼굴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두 번째로 돌아온 딸을 보자 어머니는 차분했던 이전과 달리 딸을 때리면서 상당히 격하게 대한다. &quot;어딜 들어와. 나가 죽어. 나가 죽어 이년아!&quot; 물론 이 말은 철저한 반어법이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리는 어머니. 어쩌면 딸이 그토록 원했을지도 모를 반응. 다시 마주앉은 밥상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다. &quot;왔으니까 된거야&quot;. 이 말을 들은 뒤에야 딸은 진정으로 가족에게 환대받는다. 하지만 딸에게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있다. 덩어리를 지우는 일. 진정으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워야 하는 과거. 강이의 어머니는 딸을 절에 데려간다. 어머니가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강이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quot;소영과 싸우던 날 나는 소영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소영 또한 나를 이기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한 쪽의 기도가 강해질수록 다른 한 쪽의 기도는 짓밟힌다. 기도도 기도끼리 싸움을 한다. 어떤 기도가 욕망대로 이긴다면 어떤 기도는 무참히 지게 되어있다&quot;. 이 말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딸은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딸이 더 이상 가출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소영을 이기고자 하는 기도. 밭에서 스님과 함께 꽃을 따던 중 강이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quot;아무리 따도 줄지를 않아 강이야. 매주 따는데. 그렇게 따는데. 왜 줄어들지를 않는거야!&quot; 왜 줄어들지 않는가? 꽃을 따더라도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 강이를 집 밖으로 끌어들이는 뿌리. 소영이라는 뿌리. 그래야만 딸은 덩어리를 완전히 지워내고 평범한 가족 구성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딸이 교화하는 법. 딸이 회개하는 법. (아마도)다음 날 강이는 한동안 떠나있던 학교에 찾아간다. 이번에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확실하게 자신이 학교의 타자임을 보여주는 강이. 학교는 수능이 끝난 뒤 축제의 분위기로 들떠있다. 그곳에서 강이가 소영을 부른다. 그리고 질문한다. &quot;나한테 왜 그랬어?&quot; 그러나 소영은 이 질문을 무시한다. &quot;뭐가? 뭐라는 거야?&quot; 울먹이며 칼을 들고 소영에게 다가가는 강이. 그러다 손에서 칼을 떨어뜨린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강이는 지금 소영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대답할 수 있는 기회. 마지막 우정의 흔적. 하지만 소영은 이 기회마저 무시하며 강이를 조롱한다. &quot;병신&quot;. 이 말을 들은 뒤 강이는 결국 뒤돌아가는 소영을 잡아채 칼로 찌른다. 쓰러지는 소영. 도망치는 강이. 이우정은 이 장면을 마치 목도하는 것처럼 롱쇼트로, 고정된 카메라로 찍었다. 강이는 결국 뿌리를 뽑아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며 교복 입은 소영, 제도와 질서를 체화한 소영을 죽인다. 그러니까 강이의 이 살인은 소영에 대한 복수를 넘어 한국사회에 대한 10대 타자의 마지막 저항이다. 계급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고발. 소영이 부인한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동시에 여기에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덩어리의 흔적을 지우는 행위이자 자신을 영원히 한국사회의 타자로 위치시킨다는 역설이 담겨있다. 타자에서 또다른 타자로. 그것이 소영의 폭력이 다른 소녀들에게 대물림 되지않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이는 아람의 집에 전화를 건다. 집을 나갔던 아람은 다시 돌아와있다. 그런 아람에게 소영이 묻는다. &quot;왜 그랬어?&quot; 소영에게 한 것과 다른듯 같은 질문. 아람의 대답. &quot;차에 치인 고양이를 또 만났는데 수술을 해야됐어. 고양이 살리려고 그랬다고. 근데 결국엔 죽었어. 그게 다야. 우리 돈 그 정도 밖에 없었잖아&quot;.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강이는 전화를 끊는다. 아람도 강이와 같은 절망을 마주했다. 하층민이라는 절망. 고양이를 돌보기에는 너무 가난한 현실. 아람의 세계가 지닌 한계. 결국 소영도 강이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강이는 그것을 질문한 것이 아니다. 강이는 소영에게 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아람에게도 왜 자신을 버렸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내가 홀로 소영을 기다릴 때, 너는 왜 곁에 있지 않았니? 왜 우리를 함께 묶어주던 우정을 버린거니? 강이는 결국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와 TV앞에 앉은 딸과 어머니. 이전과 달리 어머니는 밝은 분위기로 딸에게 말을 건다. 그때 강이는 TV에 등장한 소영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본 강이는 처음에는 살살 웃더니 곧 통곡을 한다. 어머니는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영은 자신의 말대로 꿈을 이루어 가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두고 강이에게 남은 일말의 죄책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강이가 다시 한번 마주하는 소영과의 계급적 간극을 더 주목하고 싶다. 강이가 소영을 죽였다고 한들 살인자로 낙인찍힐 강이와 달리 소영은 사람들에게 배우를 꿈꾸던 소녀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부르주아의 힘이다. 자신의 모든 윤리적 책임을 하층민에게 떠넘길 수 있는 존재. 이제 그 책임은 언제나 그랬듯이 강이에게 넘어간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강이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화면은 거기서 멈춘다. &amp;lt;최선의 삶&amp;gt;도 거기서 멈춘다. &lt;br&gt;&lt;br&gt;7.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영화의 에필로그. 카메라는 다시 논픽션의 시선으로 강이의 동네를 둘러본다. 이어지는 강이의 내레이션. &quot;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이도 그랬다. 아람이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다&quot;. 이우정은 강이에게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주고 영화를 마친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모두 질문할 것이다.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까? 누군가는 이를 명백한 일탈 행위에 대한 강이와 이우정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에, 그 사회에서, 그것이 강이가 선택할 수 있는, 이우정이 찍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믿고 지지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분명 이우정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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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비평</category>
      <category>이우정</category>
      <category>최선의삶</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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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5 Apr 2022 14:36:1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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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혼자 사는 사람들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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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origin-width=&quot;30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TmBG5/btrroWlgduP/xq7DekSkCueEpquCAhnNz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TmBG5/btrroWlgduP/xq7DekSkCueEpquCAhnNz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TmBG5/btrroWlgduP/xq7DekSkCueEpquCAhnNz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TmBG5%2FbtrroWlgduP%2Fxq7DekSkCueEpquCAhnNz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308&quot; height=&quot;442&quot; data-origin-width=&quot;30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1. 어쩔 수 없이 제목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 제목을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amp;lt;혼자 사는 사람들&amp;gt;. 여기에는 모순적인 표현이 혼재되어 있다. ‘혼자’라는 부사어와 ‘들’이라는 접미사의 공존. ‘혼자’라는 상태로 공존하는 개인들의 집합체. 따로 있으면서 함께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물론 영화가 시종일관 따라가는 것은 진이라는 개인이지만 그렇다면 제목을 굳이 복수형으로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특별한 공동체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는 각자 1인분의 삶을 짊어지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개인들만이 나올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amp;lt;혼자 사는 사람들&amp;gt;에서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특정 공동체가 아닌 ‘혼자’라는 상태를 공명하는 개인들 각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독립적으로 공존하는 개인들. ‘혼자 사는 사람’과 ‘혼자 사는 사람들’의 차이점. 고립과 독립의 차이. 무엇이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가?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자를 환대할 수 있는가의 차이.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의 문제. 영화 속 진아는 ‘혼자 사는 사람’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게 된다. 그건 곧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고립되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 관계를 수용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체성을 그 관계 안에서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혼자 사는 사람’ 일 때의 진아는 자기 자신을 관계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에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건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카드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을 하는 진아는 목소리만으로 고객을 응대해야 한다. 첫 장면에서 일하는 진아의 모습은 목소리는 고객을 상대하지만 눈과 손은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자아의 (의도적인) 분열. 일하는 자아와 실존의 자아.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아 본연의 자아는 자신을 관계로부터 도피시키기 위해 일하는 자아라는 가면을 파생시킨 것이다. 관계를 맺기 위한 자아. 타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면. 그러니 여기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것이 혼자 사는 사람인 진아의 모습이다. 이 불안정한 세계. 언젠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계. &amp;lt;혼자 사는 사람들&amp;gt;을 본다는 것은 혼자 사는 진아의 세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홍성은이 그 세계를 어떻게 무너뜨려가는지에 달려있다. 과정의 영화. 필연적인 도달을 향한 방법의 영화. 그때 무엇이 우리 앞에 도착하는가의 문제. &lt;br&gt;&lt;br&gt;2. 진아의 세계는 불안정하지만 그 자체로의 질서와 리듬을 가지고 있다. 아침에 출근한 후 근무를 한 뒤 점심으로 항상 같은 국수를 먹고 다시 근무를 한 후 퇴근을 한 뒤 TV를 보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이 리듬 안에는 타자가 자리할 이유가 없다. 진아의 세계에서 타자의 빈자리는 스마트폰과 TV가 대신 자리한다. 호혜적 관계에 대한 일방적 관계의 대체. 타자에 대한 자아의 방어수단. 그 자리에 홍성은은 유령을 보낸다. 진아의 옆집에 살던 남자. 죽은 지 일주일 넘게 아무도 찾지 않아 시체 썩어가는 냄새로 자신의 죽음을 알린 남자. 이 유령은 왜 나타나는가? 물론 애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누가 실패했는가? 진아가 실패하고 남자의 집주인이 실패하고 한국 사회가 실패한 애도. 그렇다면 이 유령은 왜 하필 진아에게, 가장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웃인 진아에게 찾아왔을까? 그저 옆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질문은 차라리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왜 진아만이 유령을 마주하는가? 왜 다른 인물들은 그 자리에 있는 남자의 유령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영화에서 유령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 진아가 처음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타자와 소통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장면에서부터 진아는 항상 휴대폰과 함께한다. 타자의 자리를 대체하는 매체. 그런 진아를 처음 소통하도록 만드는 타자가 유령이다. 반론. 이전 장면에서 진아는 자신의 상사인 팀장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가? 여기서 이 대화는 진아 본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진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아의 소통은 그녀 자신이 아닌 그녀의 가면이 대신한다. 그런 그녀의 가면을 뚫고 다가가는 유령. 이때 진아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진아 본인이 유령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남자. 혼자 사는 진아. 고립된 자들의 소통. 이 순간 진아는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의 죽음. 고독하고도 쓸쓸한 죽음. 그 자리에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가면 뒤에 숨어있던 자신을 만나는 것. 남자의 유령은 진아에게 서운하다는 듯이 말한다. “인사 정도는 해주지”. 인사라는 애도. 인사라는 환대. 환대받기 위해 돌아온 유령. 이 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유령과 같은 자리에 있는 진아뿐이다. 홍성은의 첫 번째 전략. 혼자 사는 사람 간의 환대. 그때부터 진아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걸 알려주듯이 (약간의 노파심이 담겨있지만) 식사를 하던 진아의 방에 잠깐의 흔들림을 일으킨다. 일상의 균열. 흔들리는 질서. 이때 진아의 세계에 균열을 가하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 진아의 휴대폰에 어머니의 전화가 온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가장한 아버지의 전화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이다. 어머니의 부재. 그 어머니를 대신하는 아버지.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딸(혹은 아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거기서 어머니의 자리가 부재이다. 진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한국 사회, 혹은 한국 기성세대의 기준에서) 정상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이때 진아의 아버지는 그들의 가족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어떻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한국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의 인정을 통해서. 이 순간 어머니의 빈자리는 아버지가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진아의 아버지는 그 자리를 자신이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법이라는 가면. 가족이라는 가면. 그렇기에 어머니의 전화도, 유산도 아버지의 것이 된다. 하지만 진아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별거하다가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고작 1년 반 정도 함께 산 것이 전부이다. 어쩌면 진아의 눈에 아버지의 병간호는 어머니의 유산을 얻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여부가 아닌 진아와 아버지가 가족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진아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법의 가면을 통해 가족관계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법이 진아의 가족 안에 개입할 때 어머니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리로 포함된다. 그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은 법의 이름 앞에서 도구화된다. 여기서 세대론이라는 홍성은의 두 번째 전략이 나타난다. &amp;lt;혼자 사는 사람들&amp;gt;에서 기성세대는 관계를 도구화해서 맺는다. 법으로서 가족을 도구화하는 진아의 아버지. 세입자인 남자의 죽음을 오로지 집값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집주인. 상담원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무개념 고객 등. 물론 이러한 세대론적인 접근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면서 이분법적으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은 위험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홍성은의 요점은 이러한 기성세대의 방법론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것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청년 세대인 진아가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진아는 기성세대의 방법론을 혐오하는 동시에 그 방법론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건 진아 스스로 그 방법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아가 기성세대와 다른 점은 타자와 물리적 거리를 좀 더 멀리 유지한다는 점뿐이다. 가면들의 관계. 홍성은은 이러한 가면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홍성은은 혼자 사는 진아의 가족을 해체시킨 것처럼 보인다. 가족이 해체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진아가 관계를 맺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은 진아가 어머니와 맺고자 하는 관계가 이웃집 남자의 유령이 요구하는 관계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거리를 두지만 인간으로서 대면하는 것. 가면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것. 타자와의 관계를 가면을 통해 맺는 진아는 오직 가족관계에서는 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대면하기를 원한다. 딸은 어머니와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딸과 어머니로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실존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아버지를 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진아에게 남자의 유령은 마치 “왜 나에게는 그렇게 대해주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것만 같다. 진아는 자신이 유령의 목소리를 외면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지켜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령의 가르침을 실현해 나갈 때이다. &lt;br&gt;&lt;br&gt;3. 진아는 원치 않게 신입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이유는 너무 일을 잘해서이다. 바꿔 말하자면 직업인으로서 진아의 자아가 너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회사는 그런 진아에게 수진이라는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을 요구한다. 이걸 오해하면 안 된다. 진아의 회사는 진아가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진아를 지배하고 있는 자아, 직업인으로서 진아의 자아가 완전히 진아 본연의 자아를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완전한 가면. 도구로서의 자아.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되는 자아. 진아는 이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그건 회사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 아니다. 진아는 그저 인간으로서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반드시 상처를 동반한다. 타자가 자아의 가면을 뚫고 들어올 때 타자의 가면 넘어 숨겨진 수많은 얼굴들의 모습을 만나야 한다. 그때 마주해야 하는 부조화. 내가 아는 타자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나타난 모습 사이의 모순. 그것을 환대하지 못할 때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진아와 수진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진아와 고객의 관계는 오직 상담원과 고객의 관계일 뿐이다. 진아 본인이 지닌 수많은 자아의 가면들도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진은 가면을 통한 관계를 거부한다. 첫 출근 하자마자 셀카를 찍는 모습에서 잘 나타나듯이 수진은 상담원이라는 직업을 새로운 자아가 아닌 수진 본연의 자아를 통해 접근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수진과 고객의 관계 역시 단순히 상담원과 고객의 관계만이 아닌 수진과 타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 뒤집어 얘기하면 수진은 고객과의 만남에서 상처를 입을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는 의미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진아는 수진과 달리 고객의 폭언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건 진아가 좋은 고객의 콜만 받아서가 아니라 진아의 직업 자아가 진아 본인을 대신해서 고객을 만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아의 직업 자아 안에서 벌어지는 환상. 오로지 상담원과 고객이라는 가면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이미지. 그래서인지 영화는 종종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수진은 그렇게 가면을 통해 관계 맺는 법을 모른다. 고객과의 통화는 단순한 상담이 아닌 타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이 된다. 그렇기에 고객이 폭언을 하면 가면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 동시에 수진은 자신을 가르쳐주는 진아와도 직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진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선물도 주지만 진아는 아직 이 타자가 불편하기만 하다. 이 관계의 원래 의도를 오해하고 있는 쪽은 수진이다. 진아가 수진을 담당한 이유, 회사가 수진을 진아에게 보낸 이유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 아닌 직업인 수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수진은 그 규정을 거부한다. 수진이 회사에 가져오는 활력은 여기서 온다. 회사 선배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 역시 인간의 얼굴로서 그들과 만나기 위한 시도이다. 그때부터 진아의 환상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가면의 환상. 분열된 자아가 만들어낸 스크린. 이 환상을 깨뜨리고자 하는 타자들. 첫 번째 타자는 유령이었지만 두 번째 타자인 수진은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세 번째 타자가 있다. 가족이라는 타자. 가족이 타자가 되는 순간. 생물학적, 법적 공동체라는 가면을 벗어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타자와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것. 어떻게? 진아는 어머니의 집에 cctv를 설치한다. 어째서? 진아는 cctv의 시선을 통해 어머니와의 물리적 거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어머니의 곁에 없다는 죄책감에 대해서 스스로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러니 곁에 있다는 것. 이때 cctv의 시선은 곧 매체의 시선이다. cctv 화면은 진아의 스마트폰과 TV 화면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매체는 무엇인가? 진아의 세계에서 타자의 자리를 대체하는 대상. 혼자 사는 사람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통로. 진아는 cctv라는 매체의 시선을 통해 가족이라는 가면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아가 간과하고 있는 점은 cctv를 통해 보는 화면에서 진아는 스스로 시선의 주인이 된다는 점이다. TV와 스마트폰에서 일방적으로 전송되는 화면을 보는 것과 달리 cctv 속 화면은 진아가 주인이 되어 바라볼 수 있다. 이 차이는 곧 대상에 대해서 무엇을 소비하는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스마트폰과 TV 화면을 볼 때 진아는 대상의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매체의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의 기호를 소비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은 이미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바이다. 기호라는 가면. 그렇기에 진아는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또 다른 맛의 기호를 소비한다. 진아의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 역시 그러한 가면과 기호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러나 cctv 화면에서는 어떠한 기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아 스스로가 매체의 시선에 대한 주인이 된 이상 그녀는 대상의 실재와 마주해야 한다. 어머니의 실재. 그리고 아버지의 실재. 타자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 진아의 세계는 그렇게 확장된다. 그리고 혼자 사는 진아는 조금씩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lt;br&gt;&lt;br&gt;4. 유령이 떠난 진아의 옆집에 성훈이 이사를 오게 된다. 다리를 다친 채 온 성훈은 진아에게 왜 집값이 이렇게 싼 것인지 물어본다. 진아는 성훈에게 이 집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면 담배 연기가 다르다는 유령의 말도 전해준다. 여기서 진아는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말 대신 사람이 죽었다는 대답. 육체와 영혼. 둘 중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의 선택. 진아는 망설임 없이 유령이 이야기한다. 어째서? 물론 그녀가 죽은 남자의 육체 대신 유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훈은 그런 진아를 비웃는다. 아직 성훈은 진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성훈이 옆집에 들어온 후 진아에게는 곧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성훈의 특이한 점은 다리를 다친 채 이사를 왔다는 점이다. 그게 왜 이상한가? 성훈은 다리를 다쳤기에 혼자서는 이사를&amp;nbsp;&amp;nbsp;할 수 없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 집에 정착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성훈은 진아와 달리 홀로 있지 않은 인물이다. 혼자 살지만 홀로 있지 않는 것. 성훈은 이미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런 성훈이 옆집에 올 때 진아 역시 변화를 맞이한다. 성훈은 이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진아의 TV전파를 방해하고 진아는 이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한다. 여러 번 언급했듯이 진아에게 TV(를 포함한 매체)는 타자를 대체하는 수단이다. 그 자리에 기호가 아닌 실재의 타자들이 들어오고자 한다. 이제 진아는 매체를 통해 대체하던 자리의 실재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아와 수진의 관계 또한 변하기 시작한다. 일을 하던 수진은 진아에게 이상한 말을 한다. 그녀의 귓가에 콜을 받을 때 울리는 연결음이 지속적으로 들린다고 한다. 이건 무슨 신호인가? 가면이 본인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징조. 회사가 수진(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에게 원하는 변화. 오로지 직업인의 자아만이 남아있는 것. 그때 진아와 수진, 그리고 직원들은 매체와 동일시된다. 기호로서의 존재. 컴퓨터 화면과 하나가 되는 것. 상호 간의 소통이 아닌 일방적 전달을 위한 소통. 당연하게도 매체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인물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이다(기성세대의 도구적 관계 역시 관계를 기호화하여 맺는 것이다). 이 신호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수진이다. 혹은 수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유령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진아였던 것처럼.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한걸음 떨어진 수진만이 자신의 실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눈치챌 수 있다. 그런 수진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곽민규라는 이름의 남자가 자신이 타임머신을 개발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를 2002년에 가져가도 쓸 수 있는지를 물어본다. 남자에게 2002년은 월드컵을 포함해서 꽤나 의미 있던 해였던 걸로 보인다. 진아는 이미 그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진아는 당연하게도 그 불가능한 문의를 직업적으로 거절한다. 하지만 진아는 점차 남자의 이야기에 몰두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quot;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quot; 여기서 우리는 진아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질문하면 안 된다. 진아는 상담원으로서는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것. 직업인의 자아를 뛰어넘는 것. 이때 진아는 남자와 고객과 상담원이 아닌 인간 대 인간, 주체와 타자로서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더 이상 기호의 논리, 자본주의의 논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진아는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 이로써 (회사가 그녀에게 맡긴) 진아의 교육은 실패한다. 이제 진아와 수진의 위치는 뒤바뀌게 된다. 진아가 수진에게 가르침을 받을 차례이다. 이 가르침을 받은 뒤 아파트 복도만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처음으로 아파트 외부 전체를 진아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집이 낯설어지는 순간. 내 옆집에 사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제야 진아는 비로소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쇼트. 진아가 바라보는 cctv 화면이 스크린에 그대로 나타난다. 화면 속에서 진아의 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람들과 함께 진아의 어머니를 위한 추도 예배를 드리고 있다. 표면적으로 아버지는 분명 자신의 아내를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애도는 뭔가 이상하다.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애도의 대상이 빠져있는 것만 같다.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와 교회 사람들은 어머니를 기억하기보다는 자신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에 바쁘다. 어머니를 위한, 그러나 어머니가 없는 애도. 이때 이 자리는 아버지 주위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신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령을 위한 자리는 사라진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 유령을 잊어버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유령을 자신의 집에서 추방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존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원한다. 유령이라는 타자. 환대받지 못하는 타자. 그 모습을 딸이 지켜보고 있다. 딸이 지켜보는 그 화면이 스크린 위를 차지한다. 이제 진아는, 그리고 우리는 기호 뒤에 숨겨져 있던 실재를 확실하게 마주하게 된다. 어떤 실재? 기호의 세계, 가면의 세계에 대한 실재. 그 세계의 부조리와 공허함. 진아는 어머니의 유령이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배제되는 것을 목격한다. 가족이라는 기호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실재.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지탱해오던 세계의 실재를 마주하는 것이다. 유령이 만들어준 길. 유령이 안내해준 세계. 이제 진아의 직업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는 무너진다. 진아는 남자의 유령이, 그리고 수진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세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다만 그녀의 옆에는 수진이 사라진 상황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은 온전히 그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lt;br&gt;&lt;br&gt;5. 회사로 출근했을 때 수진은 더 이상 자리에 있지 않다. 아니, 있을 수 없다. 회사에는 그녀 자신이 아닌 그녀의 직업 자아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수진이 근무 중 나타난 이상 회사에 수진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하지만 수진은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고 떠났다. 콜을 받은 후 진아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목 통증을 느낀 후 수진에게 선물 받은 스프레이를 처음으로 뿌린다. 선물이란 무엇인가? 아무 대가 없는 증정. 어떠한 거래도 필요 없는 것. 진아가 상품이 아닌 선물을 쓰는 순간. 그때서야 진아는 수진과 처음으로 가면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게 된다. 더 이상 진아는 자신의 직업 자아, 직업인의 가면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가면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가면이 만들어낸 일상의 환상 역시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평소처럼 똑같은 국수를 먹던 진아는 뭔가 이질적인 것을 느낀 것 마냥 먹기를 주저한다. 진아는 그제야 국수의 맛을 본 것이다. 실재의 맛. 스마트폰 화면에서 소비하던 기호의 맛이 아닌 실재의 맛. 그동안 진아에게 국수는 그 자체의 맛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맛의 기호를 매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기호 뒤에 숨어있던 국수의 맛을 진아는 만나게 된다. 기호의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일상이 낯설게 바뀌는 순간. 진아는 점차 수진의 가르침을 깨달아 나간다. 다시 일터로 복귀한 진아는 자신의 카드 명세서를 읽어달라는 고객의 콜을 받는다. 화면에는 강조하듯이 &quot;절대로 틀리지 말 것&quot;이라고 적혀있다. 기계가 될 것을 요구하는 회사. 이를 충실하게 지키며 이전과 같이 결재 내역을 읽어나가는 진아. 하지만 지금의 진아는 더 이상 직업인의 자아만이 남은 진아가 아니다. 그녀가 직업인의 가면 뒤로 숨으려고 할 때 그녀의 실존이 그녀를 부를 것이다. 컴퓨터 화면만을 쳐다보며 결재 내역을 읽어나가던 진아는 갑자기 수진이 말했던 연결음을 듣게 된다. 가면 뒤의 실존이 보내는 위험신호. 더 이상 가면에게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실존의 저항. 그러자 기계처럼 화면을 읽어나가던 진아는 고장이 난 것처럼 버벅거린다. 고객도 이에 불만을 품고 진아에게 멈추라고 한다. 하지만 진아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가면은 실존의 저항을 뿌리치려고 하듯이 더욱 자신을 강하게 표출한다. 진아의 귓가에는 연결음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진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계속 기계처럼 명세서를 읽어간다. 고객은 그런 진아에게 멈추라고 소리친다. 진아가 처음으로 고객에게 항의를 받는 순간. 이 여성 고객은 마치 진아에게 더 이상 기계처럼 말하는 것을 멈추고 인간으로서의 진아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다음 쇼트. 진아가 전날 보았던 cctv 화면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 자리에는 원래 컴퓨터 화면이 있어야 한다. 이 쇼트는 마치 cctv 화면이 갑작스럽게 침투해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 화면에는 추도 예배를 드리면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머니를 배제하는 아버지. 기호의 세계, 가면의 세계, 가면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 한국 사회와 한국 기성세대가 구축한 세계, 그 환상의 이면에 숨어있던 실재, 그 실재에 대한 환유로서의 아버지. 진아는 비로소 자신이 보았던 cctv 화면 속 아버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실재. 이토록 공허한 실재. 진아는 자신의 일터를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는 곧장 아버지의 집에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집에 없다. 전화를 걸어보니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시끄럽게 노는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계속 전화를 걸더니 갑자기 자신과 어머니에게 사과할 것을 울부짖으며 요구한다. 어떤 사과? 어머니의 유령을 집에서 쫓아낸 것, 어머니의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대체한 것, 그리고 자신을 어머니와 떨어뜨리려고 한 것. 아버지의 세계에 속해있는 한 딸은 어머니의 유령을 만날 수 없다. 그렇기에 진아는 어머니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을 것을 아버지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애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애도에는 진아가 자신을 유령과 동일시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상기해보자. 진아가 처음 이웃집 남자의 유령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아 본인이 유령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웃집 남자의 죽음에서 진아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진아가 어머니를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죽음과 동시에 추방당한다. 그건 진아 자신도 죽음 이후 아버지로부터 언제든지 버림받을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웃집 남자의 유령에게서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한 죽음을 보았다면 어머니의 유령에게서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의 상징적 추방을 보게 된다.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선 진아.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타자를 모두 환대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전화를 끊은 진아는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전과 달리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마치 하나의 여행 혹은 여정을 보는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환상을 가로지르는듯한 여정. 집에 도착했을 때 옆집에서는 성훈과 아파트 사람들이 이전에 죽은 이웃집 남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버지의 애도와 달리 성훈의 애도는 온전히 타자를 위한 애도이다. 그리고 남자의 유령은 비로소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에 환대받는다. 이것이 홍성은이 진아에게 제안하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대안이다(홍성은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성세대인 아버지는 예배라는 신세대적인 방법을, 신세대인 성훈은 제사라는 기성세대의 방법을 쓰는 역설을 배치했다). 기호가 아닌 실존의 세계. 가면이 아닌 인간의 세계. 제사가 끝난 후 성훈은 유령이 진아에게 알려준 대로 성냥불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유령과 동일시되는 성훈. 그 유령과 함께 환대받는 진아. 그리고 진아 역시 자신의 세계에 새로운 타자를 환대한다. 영화에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와도 통화를 하지 않던 진아는 처음으로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수진은 진아가 자신에게 그동안 쌓인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전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자 TV 앞에서 전화를 하던 수진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피해 고백하듯이 말한다. &quot;사실 저는 혼자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척하는 것뿐이지&quot;. 그리고 이어지는 말. &quot;난 수진 씨한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요&quot;. 이윽고 다음 쇼트에서 수진의 모습이 나온다. 집에서의 수진. 직업인으로서의 수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수진. 진아는 이 타자를 자신의 세계로 환대한다. 이웃집 남자에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통해서. &quot;수진 씨.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내가 잘 못했어요&quot;. 이 말을 들은 수화기 너머의 수진은 눈물을 흘린다. 끝내 환대받은 타자의 눈물. 자신의 가르침이 성공한 자의 눈물. 당연히도 이건 기쁨의 눈물이다. 그날 밤 진아는 처음으로 방안의 TV를 끄고 잠에 든다. 다음 날 아침, 진아는 항상 어둡고 음침하던 자신의 방에 커튼을 거두고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둔다. 이제 직업인으로서 진아는 잠시 멈출 시간이다. 항상 혼자 담배를 피우던 진아는 팀장과 함께 담배를 피운다. 여기서 두 여성은 직업인의 가면을 벗고 잠시나마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팀장은 한탄하며 말한다. &quot;내가 요즘 들어서 생각한 건데, 우리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싶어. 좀 설렁설렁할 걸 그랬나&quot;. 그리고 진아가 마지막으로 인사한다. &quot;정리되면 밥이나 같이 먹어요&quot;. 아직 팀장은 이 상투적인 인사를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 상투적인 약속은 곧 실현될 것만 같은 믿음이 간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진아에게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온다. 아버지는 지난 통화에서 딸이 울부짖으며 사과하라고 한 것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딸이 말한다. &quot;아버지 집 거실에 홈 캠이 있어요. 그걸로 아버지 집 거실 볼 수 있어요. 그걸로 자주 아버지 들여다볼게요. 딱 그렇게까지만 지내요 우리&quot;. 딸의 선언. 더 이상 딸과 아버지라는 상투적 관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마주하겠다는 선언. 그러니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있어도 계속 지켜볼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딸. 아버지는 아직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진아는 어머니의 연락처 이름을 아버지로 바꾼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리에서 딸과 만나지 못한다. 딸은 아버지와 그저 아버지로서 만나기를 바란다. 둘 사이의 간극은 딸이 거실에 둔 cctv가 메울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환대. 아버지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로의 초대.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 세대의 제안. 관객에 대한 홍성은의 제안.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진아의 모습을 처음으로 창문 밖에서 바라본다. 창문에는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 비친다. 버스 안의 진아는 이 풍경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고립되었던 진아의 일상은 이웃집을,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한 층 더 넓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계 역시 그렇게 구축되어 간다. &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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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영화비평</category>
      <category>혼자사는사람들</category>
      <category>홍성은</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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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3 Jan 2022 20:36:3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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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 홈 무비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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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origin-width=&quot;29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 data-image-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bp2nD/btrbtnEBTCK/hn9W4l9DBibNVM5hk5OdX1/img.jpg&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bbp2nD/btrbtnEBTCK/hn9W4l9DBibNVM5hk5OdX1/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bbp2nD/btrbtnEBTCK/hn9W4l9DBibNVM5hk5OdX1/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bp2nD/btrbtnEBTCK/hn9W4l9DBibNVM5hk5OdX1/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bp2nD%2FbtrbtnEBTCK%2Fhn9W4l9DBibNVM5hk5OdX1%2F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29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 data-image-src=&quot;https://blog.kakaocdn.net/dn/bbp2nD/btrbtnEBTCK/hn9W4l9DBibNVM5hk5OdX1/img.jpg&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0. 먼저 한 가지 양해의 말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지난 6월에 입대한 후 훈련소 과정부터 지금까지 글에 대한 집념과 영화에 대한 흐릿한 기억들에만 의존하여 수기로 직접 쓴 글이다. 또한 영어 자막으로만 영화를 보았기에 잘못 해석한 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다른 글들과는 달리 직접 영화 속 장면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틀린 설명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혹여나 잘못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소망한다. 다만 영화 자체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읽는 데 있어 큰 불편함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lt;br&gt;&lt;br&gt;1.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잎이 많이 떨어져나가 앙상한 나무는 황무지 한복판에서 거친 바람에 맞서 연약하게 버티고 있다. 카메라는 그 나무와 함께 바람을 견뎌내듯이 흔들림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무를 바라본다. 샹탈 아커만은 여기서 무엇을 찍은 것일까? 가련한 나무를 찍는 것일까? 아니면 그 나무를 쓰러뜨리고자하는 거친 바람을 찍는 것일까? 혹은 그 너머에 있는, 프레임에 담기고 있는 이미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담고자 한 것은 아닐까? 단 하나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이 오프닝 장면은 마치 샹탈 아커만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투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이 장면이 등장할 때 바라보는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건 영화를 보기 전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장면이 처음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서 우리는 &amp;lt;노 홈 무비&amp;gt;가 샹탈 아커만의 어머니에 관한 영화라는 것,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후 세상과 문을 닫으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에는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샹탈 아커만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의 내레이션도 등장하지 않기에 우리는 샹탈 아커만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샹탈 아커만은 어떤 것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나 역시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따라가며 설명하지 않고자 한다. 대신 어떤 의도로 샹탈 아커만이 이러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는지,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지를 따라갈 것이다. &amp;lt;노 홈 무비&amp;gt; 속 쇼트들은 각각 어떤 상호 작용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닌 각각의 쇼트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독립성은 시간적인 연속성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말 그대로 다른 쇼트들로부터의 독립이다. 말하자면 몽타주의 부재. 여기서 영화 속의 한 쇼트는 또 다른 쇼트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쿨레쇼프 효과를 부정하는 것만 같은 선택. 몽타주가 부재할 때 이미지는 어떻게 영화 속에서 버티는가? &amp;lt;노 홈 무비&amp;gt;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 쇼트들의 길이가 평균적으로 꽤나 길다는 것은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고정된 상태로 이미지를 담아낸다. 마치 샹탈 아커만은 다른 이미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온전한 형태의 이미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왜 그것이 필요했는가? 이미지가 몽타주되는 순간,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게 개입 받는 순간 이미지가 지니는 의미작용은 고정되지 않고 수많은 형태로 발산된다. 그건 이미지가 의미작용을 형성할 때 그걸 바라보는 관객이 그 계산 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보는 이들의 경험, 지식, 사회문화적 간극, 그리고 수많은 요소들의 경쟁. 샹탈 아커만은 그 경쟁을 &amp;lt;노 홈 무비&amp;gt;에서 배제한다. 그럼 이미지에는 무엇이 남는가? 단지 1초에 24번 찍히는 활동사진의 잔영만이 남을 뿐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한 가지를 간과한 것이다. 카메라가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 카메라를 잡고 있는 존재를 염두해야만 한다. 시선의 주인. 카메라를 잡은 예술가. 그때 카메라에 담기는 이미지는 감독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광과 동치된다. 모든 것은 투사한 이미지. 샹탈 아커만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경험과 정념을 담고 있는 이미지를 찾아 프레임에 담아낸다. 여기에는 어떠한 개입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amp;lt;노 홈 무비&amp;gt;속 이미지들에는 어떤 간절함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 이 순간을 붙잡겠다는 의지.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이 이미지 안에 투사하고자 하는 의지. 이미지 자체가 되고자 하는 샹탈 아커만. 그러므로 영화 속 쇼트들의 길이가 긴 것은 샹탈 아커만 본인이 자신의 카메라와 자신의 마음을 일치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마음의 풍경을 찍는 것. 가장 찍기 어려운 이미지를 찍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 이 순간 카메라는 자신을 잡은 주인의 시간을 체화한다. 내가 느끼고 있는 시간. 내가 감각한 경험들을 체화한 이미지. 그러니 이 이미지들은 몽타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는 이미지들에 담긴 샹탈 아커만의 시간에 다가가기 위한 공감과 접근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amp;lt;노 홈 무비&amp;gt; 속 쇼트들의 길이가 긴 또 다른 이유이다. 이건 단순히 롱테이크의 미학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롱테이크가 장면 속 운동의 지속을 통해 화면 안의 시간과 감정의 지속성을 담아낸다면 &amp;lt;노 홈 무비&amp;gt;에서의 롱테이크는 샹탈 아커만이 이미지에 다가가는 시간이 동시에 우리가 샹탈 아커만에게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저 황무지를 바라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시나요? 하루하루 나를 떠나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때 경험한 시간의 무게가 보이시나요? 만약 그걸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신 겁니다. 샹탈 아커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amp;lt;노 홈 무비&amp;gt;를 본다는 것은 어머니와 이별해가는 딸이 견뎌낸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간의 이미지. 순간들의 영화.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영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는 심장이다. 가슴으로 보는 영화. 이토록 순수한 이미지. 마치 연약하지만 간절하게 버티고 있는 나무 한 그루처럼. &lt;br&gt;&lt;br&gt;2. 아마도 영화를 본 후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부분은 당연히도 영화의 제목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amp;lt;노 홈 무비&amp;gt;. 이 이상한 제목. 이를 읽는 데에는 세 가지 판본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quot;노 홈무비&quot;. 이것은 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는 해석. 두 번째. &quot;노홈 무비&quot;. 이것은 집이 없는 영화이다. 세 번째. &quot;노 홈 무비&quot;. 이것은 집도, 영화도 아니다(그럼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amp;lt;노 홈 무비&amp;gt;는 &quot;홈(Home)&quot;이 사라져가는 영화이다. &quot;홈(Home)&quot;이 &quot;하우스(House)&quot;로 바뀌는 과정. 물론 이 변화는 어머니의 부재와 직결된다. 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안식처. 하우스가 홈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 그래서 샹탈 아커만은 하우스를 찍을 생각이 없다. 카메라가 집 안을 찍는 순간은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나 샹탈 아커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집 안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온기와 흔적을 찾아다니는 때, 혹은 어머니에 관해 누군가와 대화할 때가 전부이다. 하우스 안에 베어있는 홈. 그래서 샹탈 아커만은 자신의 집과 어머니의 집을 분리하지 않았다. 이때 당시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샹탈 아커만은 출근하기 전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미국에 있는 그녀의 집과 벨기에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구분할 수 없다. 그건 샹탈 아커만이 그렇게 찍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차이가 아닌 하우스를 홈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어머니의 존재 유무이다. 설사 그것이 화면 속 멀리 떨어진 어머니일지라도.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카메라는 홈을 떠나지 못하는 딸의 간절한 염원마저 깃들어져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바로 황무지의 풍경들이다. 집 바깥의 풍경. 어머니 없는 세상의 풍경. &amp;lt;노 홈 무비&amp;gt; 속의 이미지는 사실상 두 가지로 나뉜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하우스, 다시 말해 홈의 이미지. 어머니 없는 황무지의 이미지. 딸의 마음의 풍광. 그러니까 &amp;lt;노 홈 무비&amp;gt;에는 어머니가 머무는 집 안과 집 바깥의 황무지만이 나올 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샹탈 아커만의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중간에 어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정작 어머니가 산책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건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은 이후 세상과 단절된 어머니의 마음을 담기 위해 딸의 의도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푸른 공원의 평화로운 풍경을 이를 더욱 강조한다. 황무지와 같은 집 바깥의 세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 역사로부터 분리된, 역사가 중단된 삶. 하지만 샹탈 아커만은 그 시선에 역사를 개입시킬 생각이 없다. 영화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설명도, 그것을 겪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내레이션도 없다. 화면 속에는 그 역사를 온몸으로 체화한 실존의 형형한 육체만이 남아있다. 육체의 영화. 그러한 육체를 바라보는 카메라. 그렇기에 더욱 더 샹탈 아커만은 이미지들을 몽타주하며 충돌시키고 조합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amp;lt;노 홈 무비&amp;gt;에서 필요한 것은 육체와 시간이 전부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딸은 그 시간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때 어머니의 시선과 딸의 시선이 일치한다. 어머니의 세상과 딸의 세상은 같은 황무지를 바라본다. 그건 서로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녀 서로의 존재가 필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전부인 여성들. 어머니와 딸. 그 세계에 시간을 천천히 균열을 낸다. 어머니의 육체는 딸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집 바깥에만 머물던 황무지의 이미지는 모녀의 홈으로 침입한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황무지는 점점 더 영화에 자주, 더 깊숙하게 침투한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몸, 떠나가는 딸의 홈. 그러면서 샹탈 아커만의 하우스는 홈에서 황무지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쇼트. 마침내 하우스 안에는 더 이상 홈이 아닌 황무지와 같은 황량한 이미지만이 남아있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 합쳐진 두 개의 이미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무심한 시간의 힘. 이로서 &amp;lt;노 홈 무비&amp;gt;는 그 시간을 바라본 영화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다시 반복. 육체가 견디는 시간, 그 육체를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 그 시선의 주인이 견디는 시간, 마음과 이미지가 일치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 그 시선의 이미지를 이해하기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시간. 한 마디로 시간의 힘을 믿는 영화. 그 모든 시간이 축적된 이미지들. 이걸 바라보는 것을 고통스러운 일이다. 샹탈 아커만도, 우리도 그것을 견뎌야만 진정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의 향연. 연약하지만 아름답다. &lt;br&gt;&lt;br&gt;3. 어째서인지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커스틴 존슨의 &amp;l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amp;gt;가 함께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나도 알고 있다. 서로 다른 감독의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 동시에 자칫 무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비평이란 그런 일이 아니던가. 위험을 돌파하는 일. 위험 속에 숨겨진 길을 찾아내는 일.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부모와 이별을 앞둔 딸의 다큐멘터리. 가족의 상실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마주했을 때 영화는 무엇을 찍을 것인가의 문제. 여기서도 나는 두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비교하는 대신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의 실체를 되돌아 보면서 커스틴 존슨과 샹탈 아커만이 어떻게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는지를 보고자 한다(&amp;l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amp;gt;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amp;l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amp;gt;의 마지막 장면. 딕 존슨은 픽션으로 진행되는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본다. 이윽고 논픽션의 딕 존슨은 픽션 안으로 들어간다. 장례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딸의 카메라.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커스틴 존슨이 그토록 분리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실존과 죽음이라는 사건이 만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사건. 사건이라는 픽션. 아직 사건이 실존에 도래하지 않았기에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픽션화하며 여전히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무심하다. 픽션에 갇혀있던 죽음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실존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딸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때 커스틴 존슨의 선택은 그 시간을 뛰어넘고자 하는 선택이다. 딕 존슨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픽션에 뛰어들 때 그의 실존은 죽음이라는 사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때 비로서 아버지의 실존은 시간을 뛰어넘어 딸의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커스틴 존슨은 &quot;영원하라 딕 존슨&quot;이라는 말로 영화를 마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샹탈 아커만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커스틴 존슨이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실존의 형상을 찍는다면 샹탈 아커만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육체를 찍는다. (조금은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영혼을 찍는 것과 육체를 찍는 것의 차이. 다르게 말하자면 시간과 그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차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영원을 선언하는 커스틴 존슨과 달리 샹탈 아커만은 어머니가 떠난 집의 황량한 모습을 바라보며 더 이상 곁에 남아 있지 않은 어머니의 육체와 그 육체가 사라진 집, 그 집을 바라보는 마음의 풍경을 담는다. 물론 나는 두 가지 방식 다시의 우열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시련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의 문제. 커스틴 존슨처럼 죽음을 삶의 품 안으로 감싸 안을 것인가, 혹은 샹탈 아커만처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재를 바라볼 것인가. 확실한 것은 더 고통스럽게, 더욱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쪽은 &amp;lt;노 홈 무비&amp;gt;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어머니의 곁으로 떠난 샹탈 아커만의 부재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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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샹탈아커만</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영화비평</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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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8 Aug 2021 09:31: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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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겨울밤에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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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origin-width=&quot;310&quot; data-origin-height=&quot;443&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JHh34/btq69XidMIM/ZqMbKUrzPNu8qgRL1KRkX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JHh34/btq69XidMIM/ZqMbKUrzPNu8qgRL1KRkX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JHh34/btq69XidMIM/ZqMbKUrzPNu8qgRL1KRkX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JHh34%2Fbtq69XidMIM%2FZqMbKUrzPNu8qgRL1KRkXk%2F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310&quot; data-origin-height=&quot;443&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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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1. &lt;/span&gt;장우진은 춘천으로 돌아갔다&lt;span&gt;. &lt;/span&gt;이번에는 중년의 부부와 함께&lt;span&gt;. &lt;/span&gt;낯선 소재는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는 이미 전작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의 두 번째 챕터에서 중년 커플의 이야기를 따라갔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어쩌면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이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lt;span&gt;. &lt;/span&gt;장우진에게 춘천은 단순히 하나의 지역이 아닌 인간의 삶과 세계의 삼라만상이 깃들어 있는 세계 그 자체이다&lt;span&gt;. &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과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에서는 춘천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lt;span&gt;. &lt;/span&gt;지역성이 부재하는 공간&lt;span&gt;. &lt;/span&gt;그 공간에 들어설 때 인물들의 특수성과 구체성이 사라지고 남은 것들&lt;span&gt;. &lt;/span&gt;무엇이 남는가&lt;span&gt;? &lt;/span&gt;불투명하고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세계와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운동&lt;span&gt;. &lt;/span&gt;무슨 운동&lt;span&gt;? &lt;/span&gt;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회귀하고 반복되는 시간의 운동성&lt;span&gt;, &lt;/span&gt;윤회하는 시간&lt;span&gt;. &lt;/span&gt;장우진의 카메라는 그러한 시간의 윤회를 프레임 안에 담고자 한다&lt;span&gt;. &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이 연관성이 전혀 없는 세 인물을 두 챕터로 나눠 찍은 것도 서로 다른 존재에게 같은 방식으로 윤회하는 시간&lt;span&gt;, &lt;/span&gt;그러한 시간을 채화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담긴 필연적인 허무와 권태&lt;span&gt;, &lt;/span&gt;그리고 상실감을 찍기 위한 선택이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에서 반복되는 &lt;span&gt;&amp;lsquo;&lt;/span&gt;춘천&lt;span&gt;&amp;rsquo;&lt;/span&gt;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에게 같은 지역&lt;span&gt;(&lt;/span&gt;세계&lt;span&gt;)&lt;/span&gt;이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lt;span&gt;. &lt;/span&gt;취업난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미래를 낙관하고 긍정하는 젊은 지현&lt;span&gt;, &lt;/span&gt;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중년의 흥주와 세랑&lt;span&gt;. &lt;/span&gt;아마 흥주와 세랑의 시간은 지현에게 윤회하고 반복될 것이다&lt;span&gt;. &lt;/span&gt;청평사와 같은 절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윤회의 문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장우진의 의도를 나타낸다&lt;span&gt;. &lt;/span&gt;그러한 그가 거의 같은 주제의식과 함께 춘천으로 돌아왔다&lt;span&gt;. &lt;/span&gt;가장 먼저 드러나는 차이&lt;span&gt;. &lt;/span&gt;전작의 제목인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이 영화의 공간성을 강조한다면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라는 제목은 영화 속의 시간성을 강조한다&lt;span&gt;. &lt;/span&gt;이 요소들은 각 영화에서 중첩되고 반복되는 요소이다&lt;span&gt;. &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플롯이 춘천이라는 &lt;span&gt;(&lt;/span&gt;같은 듯 다른&lt;span&gt;)&lt;/span&gt;중첩된 하나의 공간에서 펼쳐질 때 나타나는 차이&lt;span&gt;, &lt;/span&gt;공간의 중첩이 드러내는 반복과 윤회에 집중한다면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는 한발 더 나아가 완전히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중첩시키면서 만들어지는 반복과 차이를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겨울이라는 계절&lt;span&gt;, &lt;/span&gt;밤이라는 시간&lt;span&gt;. &lt;/span&gt;그러나 존재가 경험하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같은 경험이 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같은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lt;span&gt;. &lt;/span&gt;하나의 시간 안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시간대가 뒤섞여있다&lt;span&gt;. &lt;/span&gt;장우진은 그 시간대가 중첩되는 순간의 모호함과 신비로움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lt;span&gt;. &lt;/span&gt;이때 중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모든 존재들에게 반복되고 윤회하는 영원회귀 그 자체이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장우진의 영화에서 인간의 삶은 윤회하는 시간 아래에서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을 뿐 결국 영원회귀를 향해 나아간다는 운명론적인 태도와 직결된다&lt;span&gt;. &lt;/span&gt;한 존재가 이미 지나온 시간&lt;span&gt;, &lt;/span&gt;그리고 다른 한 존재가 겪고있는 시간&lt;span&gt;. &lt;/span&gt;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lt;span&gt;. &lt;/span&gt;그 순간이 겨울밤이 되었을 때 프레임 안에 잡히는 것들&lt;span&gt;. &lt;/span&gt;그것이 그려주는 한 폭의 수채화&lt;span&gt;. &lt;/span&gt;그럴 때 장우진의 카메라는 한 폭의 도화지처럼 보인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2. &lt;/span&gt;은주와 흥주가 춘천으로 들어온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는 택시의 앞모습을 계속 따라간다&lt;span&gt;. &lt;/span&gt;이때 뒷자리에 타고 있는 은주의 모습은 앞자리의 흥주와 기사에 비하면 어둡고 흐릿하게 보인다&lt;span&gt;. &lt;/span&gt;흥주와 기사는 서로의 추억을 나누며 이야기에 빠져든다&lt;span&gt;. &lt;/span&gt;그러던 중 은주가 자신의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고 택시를 돌려달라고 요청한다&lt;span&gt;. &lt;/span&gt;그렇게 택시가 불법유턴하기 직전 화면에는&lt;span&gt; &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라는 영화의 제목이 뜬다&lt;span&gt;. &lt;/span&gt;아마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을 본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눈치챘을 것이다&lt;span&gt;. &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에서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은 두 챕터 사이에 위치해있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분기점&lt;span&gt;. &lt;/span&gt;혹은 전환점&lt;span&gt;. &lt;/span&gt;챕터가 바뀌고 공간의 의미가 바뀌는 순간&lt;span&gt;. &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 &lt;/span&gt;역시 같은 전략을 반복한다&lt;span&gt;. &lt;/span&gt;택시가 불법유턴하는 순간&lt;span&gt;. &lt;/span&gt;현재의 시간대를 벗어나 이미 지나온 시간대로의 회귀&lt;span&gt;. &lt;/span&gt;중첩되는 두 개의 시간대&lt;span&gt;. &lt;/span&gt;그때 비로서&lt;span&gt; &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가 시작된다&lt;span&gt;. &lt;/span&gt;무엇을 위해&lt;span&gt;? &lt;/span&gt;잃어버린 은주의 휴대폰을 찾기 위한 여정&lt;span&gt;. &lt;/span&gt;분명 누군가는 이러한 플롯을 본 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lt;span&gt;. &lt;/span&gt;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는 무언가&lt;span&gt;. &lt;/span&gt;그럴 때 표층으로 드러나는 실존의 초상&lt;span&gt;. &lt;/span&gt;누가 보더라도 &lt;span&gt;&amp;lt;&lt;/span&gt;정사&lt;span&gt;&amp;gt;&lt;/span&gt;의 플롯&lt;span&gt;. &lt;/span&gt;그리고 마치 &lt;span&gt;&amp;lt;&lt;/span&gt;태양은 외로워&lt;span&gt;&amp;gt;&lt;/span&gt;의 엔딩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lt;span&gt;. &lt;/span&gt;하지만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이 목적 자체를 상실 혹은 망각하게 되는 플롯이라면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의 은주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끝까지 기억한다&lt;span&gt;. &lt;/span&gt;자신의 휴대폰&lt;span&gt;. &lt;/span&gt;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겼는가&lt;span&gt;? &lt;/span&gt;예전에 찍은 사진 몇 장&lt;span&gt;. &lt;/span&gt;간절하게 간직하고 있던 나의 과거&lt;span&gt;. &lt;/span&gt;현재를 구성하고 지탱하던 과거가 부재할 때 흔들리는 실존&lt;span&gt;. &lt;/span&gt;그런데 왜 그 역할을 하필 은주&lt;span&gt;, &lt;/span&gt;한 남자의 아내가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누군가는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동원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나는 이것이&lt;span&gt; (&lt;/span&gt;장우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lt;span&gt;)&lt;/span&gt;틀린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lt;span&gt;. &lt;/span&gt;누군가 그런 식의 해석을 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나는 여기서 젠더의 문제를 이끌어 들이기보다는 이를 잠시 배제하고 은주와 흥주 각자가 보이는 태도의 차이 자체에 집중할 생각이다&lt;span&gt;. &lt;/span&gt;은주는 영화 내내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흥주는 그런 은주가 못마땅하다&lt;span&gt;. &lt;/span&gt;그녀가 휴대폰을 찾기 위해 문이 닫힌 청평사에 들어가려고 할 때도 흥주는 화를 내며 만류한다&lt;span&gt;. &lt;/span&gt;잃어버린 과거에 매달리는 행위는 흥주에게 용납될 수 없다&lt;span&gt;. &lt;/span&gt;어째서&lt;span&gt;? &lt;/span&gt;은주가 현재의 시간대를 이탈할 때 그녀가 지탱하고 있던 흥주의 실존 역시 흔들리게 된다&lt;span&gt;. &lt;/span&gt;흥주는 그 위기에서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lt;span&gt;. &lt;/span&gt;그래서 그가 자신의 장갑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는 찾을 생각이 없다&lt;span&gt;. &lt;/span&gt;잃어버린 것은 대체하면 된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무엇으로&lt;span&gt;?) &lt;/span&gt;은주는 청평사에서 흥주와 다툰 뒤 갑자기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흥주는 사라진 은주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도중 은주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다&lt;span&gt;. &lt;/span&gt;분명하게 말하자면 흥주가 그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은주가 돌아온 것이다&lt;span&gt;. &lt;/span&gt;왜 돌아왔는가&lt;span&gt;? &lt;/span&gt;우리는 그전에 흥주가 왜 그녀를 애타게 찾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은주의 부재는 곧 흥주의 현실이 흔들리는 것이고 흥주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lt;span&gt;. &lt;/span&gt;이때 이 행위는 은주의 존재를 하나의 실재로서 인식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환상이 아닌 실재로서의 존재&lt;span&gt;. (&lt;/span&gt;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lt;span&gt;)&lt;/span&gt;대타자로서의 존재&lt;span&gt;. &lt;/span&gt;실재의 부재로 인해 흔들리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흥주는 은주를 찾아야 한다&lt;span&gt;. &lt;/span&gt;이건 바꿔 말하자면 은주 역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흥주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잠시 흥주에게서 벗어났던 은주는 다시 흥주에게 돌아온다&lt;span&gt;. &lt;/span&gt;두 부부는 다시 만난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lt;span&gt;. &lt;/span&gt;이때 부부의 뒤 편에는 군인 남자와 그의 친구&lt;span&gt;(&lt;/span&gt;라고 말하는&lt;span&gt;)&lt;/span&gt;여자가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다&lt;span&gt;. &lt;/span&gt;식당 &lt;span&gt;cctv&lt;/span&gt;에서 나왔던 커플&lt;span&gt;. &lt;/span&gt;마치 흥주와 은주의 과거라고 되는 것 같은 존재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 커플은 부부의 과거라기보다는 부부가 지나온 시간대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로 보인다&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커플과 부부 사이에서 중첩되는 것은 존재가 아닌 시간이다&lt;span&gt;. &lt;/span&gt;그렇지 않고서야 왜 영화가 사물인 &lt;span&gt;cctv&lt;/span&gt;의 시점까지 동원하여 그 둘을 분리하고자 애쓰겠는가&lt;span&gt;? &lt;/span&gt;여기서 문제의 초점은 옮겨간다&lt;span&gt;. &lt;/span&gt;흥주와 은주는 자신들의 과거가 아닌 자신들이 지나온 시간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을 통해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 자체를 마주하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lt;span&gt;? &lt;/span&gt;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마주했을 때 정말 나타나는 것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권태와 허무로 가득 찬 현재이다&lt;span&gt;. &lt;/span&gt;이를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의 문제&lt;span&gt;. &lt;/span&gt;흥주와 은주는 여기서부터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3. &lt;/span&gt;부부가 열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흥주는 잠이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겨울 풍경과 심우도&lt;span&gt;. &lt;/span&gt;동자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선종화&lt;span&gt;(&lt;/span&gt;禪宗畫&lt;span&gt;). &lt;/span&gt;한 인터뷰에서 장우진은 심우도를 챕터의 기준으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lt;span&gt;. &lt;/span&gt;이제 흥주의 챕터가 시작될 것이다&lt;span&gt;. &lt;/span&gt;흥주는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가게 사장에게 어묵 국물을 얻어 마신다&lt;span&gt;. &lt;/span&gt;그때 흥주의 등 뒤로 하얀 옷의 여자가 지나간다&lt;span&gt;. &lt;/span&gt;흥주 본인도 이를 감지한 듯하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그런 흥주에게 배경을 지워내듯이 서서히 다가간다&lt;span&gt;. &lt;/span&gt;여자를 쫓아가던 흥주는 한 노래방에 들어간다&lt;span&gt;. &lt;/span&gt;이때 장우진은 방황하는 흥주를 바라보며 카메라 안에 흥주가 잃어버린 장갑을 어떻게 해서든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lt;span&gt;. &lt;/span&gt;간신히 프레임에 걸쳐있는 장갑&lt;span&gt;. &lt;/span&gt;현재의 흔적&lt;span&gt;. &lt;/span&gt;마치 이건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카메라&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장면&lt;span&gt;. &lt;/span&gt;노래를 부르다 자리에 앉은 흥주 앞에 그의 뒤를 지나갔던 하얀 옷의 해란이 이상한 방식으로 나타난다&lt;span&gt;. &lt;/span&gt;해란은 술에 취해 앉은 흥주의 맞은 편에서 의자 위로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그런 해란을 그녀의 정면이 아닌 뒤에서만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그녀를 본 흥주는 놀란 눈치이다&lt;span&gt;. &lt;/span&gt;함께 그 자리에 왔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리가 없다&lt;span&gt;. &lt;/span&gt;누구든지 이 연출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것이다&lt;span&gt;. &lt;/span&gt;환상의 시작&lt;span&gt;. &lt;/span&gt;현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흥주의 환상&lt;span&gt;. &lt;/span&gt;이때 바로 이전 쇼트에서 등장했던 장갑의 존재를 잊으면 안 된다&lt;span&gt;. &lt;/span&gt;흥주는 지금 잃어버린 장갑의 자리를 해란의 존재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현실을 환상으로 대체하는 것&lt;span&gt;. &lt;/span&gt;환상으로의 후퇴&lt;span&gt;. &lt;/span&gt;반복해서 말하자면 잃어버린 것은 대체하면 된다&lt;span&gt;. &lt;/span&gt;어떻게&lt;span&gt;? &lt;/span&gt;흥주는 현실에서 부재하는 부분을 환상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lt;span&gt;. &lt;/span&gt;휴대폰에서 고작 사진 몇 장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환상은 결국 상상계에 폐쇄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때문에 과거의 실재가 사라지는 순간 환상은 그 실재를 각각의 상상계 안에서 변질시킬 것이다&lt;span&gt;. &lt;/span&gt;은주가 휴대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재를 잡아두면서 부부의 현실이 안정적으로 고정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여기서 나는 내가 썼던 표현을 스스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lt;span&gt;. &lt;/span&gt;흥주와 은주 중에서 현실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인물은 흥주가 아닌 은주이다&lt;span&gt;. &lt;/span&gt;은주가 집착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루는 과거의 실재이다&lt;span&gt;. &lt;/span&gt;은주는 부부의 현실이 환상의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기를 원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환상으로 후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흥주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이때 이 환상은 단순히 꿈과 같이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환상은 대상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lt;span&gt;. &lt;/span&gt;해란을 만난 것은 실제의 유무를 떠나 자신의 환상과 마주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어떤 환상&lt;span&gt;? &lt;/span&gt;흥주는 해란과 함께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lt;span&gt;. &lt;/span&gt;회상이라는 환상&lt;span&gt;. &lt;/span&gt;회상은 곧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환상이다&lt;span&gt;. &lt;/span&gt;그것이 흥주가 현실을 버티는 방법이다&lt;span&gt;. &lt;/span&gt;환상 안에서 흥주는 해란과의 뽀뽀를 허락받기 위해 은주에게 전화를 건다&lt;span&gt;. &lt;/span&gt;이때 흥주의 행위는 이전까지 대타자의 자리에 가있던 은주를 소타자에 자리시키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다시 한번 라캉적인 의미에서의&lt;span&gt;)&lt;/span&gt;거울로의 후퇴&lt;span&gt;. &lt;/span&gt;이 안에서 은주는 흥주에게 대상화 된다&lt;span&gt;. &lt;/span&gt;관계의 균열&lt;span&gt;. &lt;/span&gt;현실의 위기&lt;span&gt;. &lt;/span&gt;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해란과 함께 산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흥주는 경찰에게 단속되어 신분증을 제시한다&lt;span&gt;. &lt;/span&gt;현실이 환상을 멈추는 순간&lt;span&gt;. &lt;/span&gt;해란 역시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운다&lt;span&gt;. &lt;/span&gt;해란이 사라진 후 취한 몸을 이끌고 산을 오르던 흥주는 창문 너머로 젊은 여자를 발견한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미 해란과 함께 있는 흥주 앞을 젊은 커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lt;span&gt;. &lt;/span&gt;그때 흥주는 이 커플을 그냥 지나치지만 혼자 남게 된 흥주는 여자를 알아보는 듯하다&lt;span&gt;. &lt;/span&gt;젊음의 시간&lt;span&gt;. &lt;/span&gt;내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시간&lt;span&gt;. &lt;/span&gt;그리고 창문 안쪽에 조명이 꺼지자 유리창에 흥주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lt;span&gt;. &lt;/span&gt;그가 진짜로 마주하게 된 것&lt;span&gt;. &lt;/span&gt;결국 환상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자리&lt;span&gt;. &lt;/span&gt;현재의 시간&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어지는 &lt;span&gt;(&lt;/span&gt;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lt;span&gt;)&lt;/span&gt;다음 장면&lt;span&gt;. &lt;/span&gt;어쩌면 장우진은 투명한 유리창 위에 이 장면을 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4. &lt;/span&gt;젊은 커플은 얼어붙은 폭포를 얼음 위에서 구경한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지만 여자는 경치 구경하기에 바쁘다&lt;span&gt;. &lt;/span&gt;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얼음이 없어 둘은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lt;span&gt;. &lt;/span&gt;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이에 대해 물어보지만 여자는 답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얼음 위에서 불안하게 움직이는 여자가 답답했는지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다가간다&lt;span&gt;. &lt;/span&gt;여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프레임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야 한다&lt;span&gt;. &lt;/span&gt;프레임 안으로 돌아온 남자는 연신 여자에게 화를 내며 물어본다&lt;span&gt;. &amp;ldquo;&lt;/span&gt;얘기를 안 하며 내가 어떻게 알아&lt;span&gt;. &lt;/span&gt;나는 아무도 아냐&lt;span&gt;? &lt;/span&gt;나는 너한테 아무도 아니냐고&lt;span&gt;!&amp;rdquo; &lt;/span&gt;하지만 여자는 반응이 없다&lt;span&gt;. &lt;/span&gt;소리치는데 지친 남자는 기침을 하며 쓰러진다&lt;span&gt;. &lt;/span&gt;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 쪽으로 다가와 함께 눕는다&lt;span&gt;. &lt;/span&gt;그들은 더 이상 얼음이 깨질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lt;span&gt;? &lt;/span&gt;이 장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푸른색의 색감이다&lt;span&gt;. &lt;/span&gt;이 색감은 상당히 인공적인 느낌으로 연출되었다&lt;span&gt;. &lt;/span&gt;누군가는 이 푸른 색채를 보자마자 떠올렸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푸른색과 대비되는 붉은색의 색감&lt;span&gt;. &lt;/span&gt;열풍기의 색&lt;span&gt;. &lt;/span&gt;은주와 흥주가 머무는 숙소 방안을 감싸는 색채&lt;span&gt;. &lt;/span&gt;완전히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대&lt;span&gt;. &lt;/span&gt;부부의 시간대는 열풍기의 붉은색이 얼음의 푸른색을 녹이는 때이다&lt;span&gt;. &lt;/span&gt;그들 사이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을 단단한 얼음이 더 이상은 없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젊은 커플은 아직 그 얼음 위에서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다&lt;span&gt;. &lt;/span&gt;미래를 걱정하는 남자는 이 얼음이 깨지거나 녹을 것을 걱정하지만 여자는 그저 자신이 지금 속해 있는 시간대를 긍정할 뿐이다&lt;span&gt;. &lt;/span&gt;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 규정해주기를 원한다&lt;span&gt;. &lt;/span&gt;마치 현실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은주처럼&lt;span&gt;. &lt;/span&gt;아마도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을 본 사람이라면&lt;span&gt; &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의 군인 남자와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의 지현을 연기하는 배우&lt;span&gt;, &lt;/span&gt;젊은 여자와 지현이 유람선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여자 승객을 연기하는 배우가 같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lt;span&gt;. &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에서 서로 지나쳤던 인물들의 만남&lt;span&gt;. &lt;/span&gt;그래서인지 &lt;span&gt;&amp;lt;&lt;/span&gt;춘천&lt;span&gt;, &lt;/span&gt;춘천&lt;span&gt;&amp;gt;&lt;/span&gt;의 첫 번째 챕터 마지막 장면에서 지현이 유람선 위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마치 구조 요청이라도 하듯이 팔을 흔드는 장면은 &lt;span&gt;&amp;lt;&lt;/span&gt;겨울밤에&lt;span&gt;&amp;gt;&lt;/span&gt;에서 폭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남녀의 상황과 유사하게 보인다&lt;span&gt;. &lt;/span&gt;여자를 찾는 남자&lt;span&gt;. &lt;/span&gt;침묵하는 여자&lt;span&gt;. &lt;/span&gt;하지만 전작에서 엇갈려 나가며 이어지지 못했던 남녀는 한 프레임 안에서 만나게 된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자신의 불안한 현실을 고정하고 여자가 지탱해주기를 바란다&lt;span&gt;(&lt;/span&gt;여기에서 은주와 흥주의 자리는 정반대로 뒤바뀌어 반복된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여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여자는 침묵으로서 남녀가 처한 불안정한 현실을 긍정하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아무것도 되지 않기&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그 자체로 무언가가 되는 것&lt;span&gt;. &lt;/span&gt;여자는 남자에게 이렇게 젊음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젊음의 기운으로 충만한 커플을 얼음 위에 누워 이를 만끽한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 직전에 유리창에 비치던 흥주의 얼굴을 잊으면 안 된다&lt;span&gt;. &lt;/span&gt;이것은 흥주의 또 다른 환상일까&lt;span&gt;? &lt;/span&gt;아니면 흥주가 유리창에서 정말 마주한 것을 그려낸 장우진의 수채화일까&lt;span&gt;? &lt;/span&gt;분명한 것은 이 장면을 흥주가 마주했을 때 더욱 부각되는 것은 젊은 커플의 활기가 아닌 더는 이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흥주의 허무와 권태이다&lt;span&gt;. &lt;/span&gt;되돌릴 수 없는 젊음&lt;span&gt;. &lt;/span&gt;깨달음을 얻는 흥주&lt;span&gt;. &lt;/span&gt;그리고 두 번째 심우도&lt;span&gt;. &lt;/span&gt;다음 챕터의 시작&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5. &lt;/span&gt;흥주는 구토를 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한다&lt;span&gt;. &lt;/span&gt;구토가 나오는 순간 흥주는 카메라에서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토사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은주가 발자국을 남기며 나타난다&lt;span&gt;. &lt;/span&gt;마치 흥주가 은주를 토해낸 것처럼 보이는 연출&lt;span&gt;. &lt;/span&gt;이때 흥주가 토해낸 은주는 흥주의 환상 속에 갇혀있던 소타자의 은주이다&lt;span&gt;. &lt;/span&gt;흥주의 환상에서 빠져나온 은주는 소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대타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lt;span&gt;. &lt;/span&gt;풍경 너머로 걸어가는 은주&lt;span&gt;. &lt;/span&gt;다시 한번 휴대폰을 찾기 위해 그녀는 청평사에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스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뒤져보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스님과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후 떠나는 은주&lt;span&gt;. &lt;/span&gt;그녀의 밑에는 젊은 커플이 몰래 담배를 피고있다&lt;span&gt;. &lt;/span&gt;흥주와 달리 은주의 시선을 피한 커플&lt;span&gt;. &lt;/span&gt;은주와 커플의 동선은 계속 아슬아슬하게 엇갈린다&lt;span&gt;. &lt;/span&gt;다시 얼음 위에 눕는 커플&lt;span&gt;. &lt;/span&gt;이윽고 세 번째 심우도가 화면에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세 번째 챕터&lt;span&gt;. &lt;/span&gt;은주는 커플이 있었던 폭포에 간다&lt;span&gt;. &lt;/span&gt;여자가 그랬듯이 조심스럽게 얼음 위에 걸음을 내딛고 물을 만져본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젊은 여자가 있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던 얼음이 조금씩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lt;span&gt;. &lt;/span&gt;은주와 젊은 여자의 차이&lt;span&gt;. &lt;/span&gt;여자는 얼음 위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서있을 수 있는 젊음&lt;span&gt;, &lt;/span&gt;아직은 가벼운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이 얼음은 은주가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아니&lt;span&gt;, &lt;/span&gt;어쩌면 은주가 가지고 있는 온기가 얼음을 녹인 것일지도 모른다&lt;span&gt;. &lt;/span&gt;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힌 은주는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lt;span&gt;. &lt;/span&gt;소리를 들은 커플이 나타나 은주를 구해준다&lt;span&gt;. &lt;/span&gt;은주와 젊은 남녀가 만나는 곳&lt;span&gt;. &lt;/span&gt;시간이 중첩되는 공간&lt;span&gt;. &lt;/span&gt;흥주는 그저 바라만 보았던 공간&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왜 은주만이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가&lt;span&gt;? &lt;/span&gt;이 질문은 사실상 &lt;span&gt;&amp;ldquo;&lt;/span&gt;왜 흥주는 만날 수 없었던 젊은 남녀를 은주는 만날 수 있는가&lt;span&gt;?&amp;rdquo;&lt;/span&gt;라고 바뀌어도 무방하다&lt;span&gt;. &lt;/span&gt;한번 더 반복하겠다&lt;span&gt;. &lt;/span&gt;흥주와 은주의 차이&lt;span&gt;. &lt;/span&gt;흥주는 흔들리는 현실을 자신의 환상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은주는 그 현실을 끝까지 지탱하고 고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환상으로 현실을 메우고자 시도하는 흥주는 젊음의 실재와 직접 대면할 수 없다&lt;span&gt;. &lt;/span&gt;그가 결코 대면할 수 없는 젊음의 시간대를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자리에 밀려오는 &lt;span&gt;(&lt;/span&gt;사르트르적 의미로 말하자면&lt;span&gt;)&lt;/span&gt;실존의 구토뿐이다&lt;span&gt;. &lt;/span&gt;이 실재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환상이 아닌 실재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므로 실재의 영역에서 현실과 마주하는 은주만이 젊음과 대면할 수 있다&lt;span&gt;. &lt;/span&gt;커플과 만난 은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lt;span&gt;. &lt;/span&gt;흥주가 창문 밖에서 바라만 보았던 건물&lt;span&gt;. &lt;/span&gt;군인 남자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lt;span&gt;. &lt;/span&gt;두 여자 간의 진솔한 대화가 이어진다&lt;span&gt;. &lt;/span&gt;은주는 자신이 흥주와 싸우고 헤어진 뒤 못 찾았다고 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흥주를 걱정하지는 않는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은주는 젊은 여자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자신과 여자 사이에 중첩되는 점이 꽤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lt;span&gt;. &lt;/span&gt;이 이야기를 나눌 때 은주는 비로소 시간과 삶의 윤회를 마주하게 된다&lt;span&gt;. &lt;/span&gt;내가 겪어왔던 삶의 반복&lt;span&gt;. &lt;/span&gt;타자에게도 윤회하는 나의 시간&lt;span&gt;. &lt;/span&gt;이건 자신의 회상 안에서 폐쇄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는 흥주가 절대 마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lt;span&gt;. &lt;/span&gt;거울 안의 자아&lt;span&gt;. &lt;/span&gt;그 자아는 결코 세계의 윤회라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lt;span&gt;. &lt;/span&gt;이야기를 마친 은주는 젊은 커플과 헤어진다&lt;span&gt;. &lt;/span&gt;노래를 부르며 떠나는 커플&lt;span&gt;. &lt;/span&gt;그 노래와 함께 화면을 채우는 네 번째 심우도&lt;span&gt;. &lt;/span&gt;흥주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은 은주&lt;span&gt;. &lt;/span&gt;중년의 부부는 열풍기의 붉은색이 가득 찬 방안에서 다시 만난다&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6. &lt;/span&gt;흥주가 침묵을 깨고 먼저 묻는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나 밉지&lt;span&gt;?&amp;rdquo; &lt;/span&gt;은주의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아니&lt;span&gt;, &lt;/span&gt;난 당신이 나 미워하는 줄 알았지&lt;span&gt;&amp;rdquo;. &lt;/span&gt;이윽고 흥주가 말을 꺼낸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난 그냥 모르겠어&lt;span&gt;. &lt;/span&gt;당신 힘든 거 아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냥 모르겠어&lt;span&gt;. &lt;/span&gt;이제는 그냥 그 모르겠는게 굳어져버린 것 같아&lt;span&gt;&amp;rdquo;. &lt;/span&gt;흥주는 이제 인정한다&lt;span&gt;. &lt;/span&gt;자신과 은주 사이 메울 수 없는 균열&lt;span&gt;. &lt;/span&gt;부부가 겪고 있는 관계의 위기&lt;span&gt;. &lt;/span&gt;그러자 은주가 말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어렸을 때 참 예뻤는데&lt;span&gt;. &lt;/span&gt;그냥 같이 있으면 내가 행복해 하는 줄 알았거든&lt;span&gt;. &lt;/span&gt;그래서 같이 있었는데 아닌 것 같더라고 어느 순간부터&lt;span&gt;. &lt;/span&gt;그럼 내가 필요가 없잖아&lt;span&gt;&amp;rdquo;. &lt;/span&gt;흥주의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필요 있고 말고가 어디 있어&lt;span&gt;. &lt;/span&gt;곁에 있으면 되지&lt;span&gt;&amp;rdquo;. &lt;/span&gt;그러자 은주가 반박하듯이 대답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외롭더라&lt;span&gt;. &lt;/span&gt;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lt;span&gt;&amp;rdquo;. &lt;/span&gt;여기서 은주는 자신이 흥주에게 있어 그동안 소타자의 자리에 있었음을 지적한다&lt;span&gt;. &lt;/span&gt;부부의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대상&lt;span&gt;. &lt;/span&gt;그 대상이 대타자의 자리로 옮겨가면서 일어난 위기&lt;span&gt;. &lt;/span&gt;실재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남편과 필사적으로 실재를 붙잡고자 하는 아내 사이의 간극&lt;span&gt;. &lt;/span&gt;그리고 날이 밝아 온다&lt;span&gt;. &lt;/span&gt;부부는 숙소를 떠나 다시 한번 택시를 탄다&lt;span&gt;. &lt;/span&gt;같은 듯 달라 보이는 길&lt;span&gt;. &lt;/span&gt;흥주는 택시 기사와 이전과 유사한 대화를 이어 간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이번에는 뒷자리에 앉은 은주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게 선명하게 보인다&lt;span&gt;. &lt;/span&gt;그러다가 갑자기 은주가 택시를 세운다&lt;span&gt;. &lt;/span&gt;차가 멈춘 후 은주는 아무 말없이 택시에서 내린다&lt;span&gt;. &lt;/span&gt;뒤쫓아온 흥주가 말을 걸어보지만 그녀는 침묵을 지킨다&lt;span&gt;. &lt;/span&gt;침묵하는 것&lt;span&gt;. &lt;/span&gt;우리는 젊은 여자가 남자에게 침묵한 것을 이미 보았다&lt;span&gt;. &lt;/span&gt;여기서의 침묵은 자신을 표현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현재의 상황을 긍정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은주는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가&lt;span&gt;? &lt;/span&gt;관계의 위기&lt;span&gt;. &lt;/span&gt;부부 사이의 커다란 간극&lt;span&gt;. &lt;/span&gt;은주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lt;span&gt;. &lt;/span&gt;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흥주와 달리 은주는 그저 부부가 처한 상황 자체를 긍정한다&lt;span&gt;. &lt;/span&gt;새로운 도약의 순간&lt;span&gt;. &lt;/span&gt;젊은 남녀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lt;span&gt;. &lt;/span&gt;아내는 이제 남편을 위한 대상이 되면서까지 이 현실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 긍정이 내포하는 것은 현실의 위기를 넘어 자신에게 다가올 또 다른 윤회의 시간까지도 긍정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장우진은 중년의 위 세대&lt;span&gt;, &lt;/span&gt;노년의 세대는 다루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앞으로 두 부부에게 어떤 시간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든 간에 그 윤회의 실재를 외면하면서 현실을 유지하고자 했던 흥주와 달리 그 실재를 대면한 은주는 자신에게 다가올 그 모든 윤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lt;span&gt;. &lt;/span&gt;그 모든 허무와 권태 역시 회피하지 않고 긍정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으로 도약할 수 있다&lt;span&gt;. &lt;/span&gt;심우도를 따라가는 것만 같은 은주&lt;span&gt;. &lt;/span&gt;부부의 뒤편에 서있는 택시는 계속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들&lt;span&gt;. &lt;/span&gt;은주가 지나왔던 공간들&lt;span&gt;. &lt;/span&gt;흥주가 구토를 했던 공간 저편에서 은주가&lt;span&gt;, &lt;/span&gt;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들어온다&lt;span&gt;. &lt;/span&gt;안토니오니와는 정반대의 선택&lt;span&gt;. &amp;lt;&lt;/span&gt;태양은 외로워&lt;span&gt;&amp;gt;&lt;/span&gt;에서 안토니오니가 인물들이 부재하는 공간들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냈다면 장우진은 그 공간에 새롭게 태어난 인물을 보낸다&lt;span&gt;. &lt;/span&gt;이제 은주는 흥주의 대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거듭났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눈밭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을 다시 한번 내려다본다&lt;span&gt;. &lt;/span&gt;겨울밤에 펼쳐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lt;span&gt;. &lt;/span&gt;혹은 이제 끝나도 된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lt;span&gt;.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category>겨울밤에</category>
      <category>리뷰</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영화비평</category>
      <category>장우진</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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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Jun 2021 18:14: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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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바람의 언덕 리뷰</title>
      <link>https://filmandday.tistory.com/43</link>
      <description>&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image-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aHQrJ/btq3hnFMMlp/oRR7JO3FG3qYnXbdXv64RK/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30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aHQrJ/btq3hnFMMlp/oRR7JO3FG3qYnXbdXv64R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aHQrJ/btq3hnFMMlp/oRR7JO3FG3qYnXbdXv64R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aHQrJ/btq3hnFMMlp/oRR7JO3FG3qYnXbdXv64R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aHQrJ%2Fbtq3hnFMMlp%2FoRR7JO3FG3qYnXbdXv64RK%2Fimg.jpg&quot; data-image-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aHQrJ/btq3hnFMMlp/oRR7JO3FG3qYnXbdXv64RK/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308&quot; data-origin-height=&quot;442&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br&gt;0. 먼저 한 가지. 나는 아직 박석영 감독의 전작들인 &amp;lt;들꽃&amp;gt;, &amp;lt;스틸 플라워&amp;gt;, &amp;lt;재꽃&amp;gt;을 감상하지 못한 상태이다. 분명 이 영화들을 보고 &amp;lt;바람의 언덕&amp;gt;을 감상한다면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테지만 그러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어떤 순수한 힘 자체에 이끌려 글을 써내려 갔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다른 영화들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오직 영화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이라면 영화를 보는 나를 매혹시킨 영화 고유의 리듬과 운동성을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실패 자체에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시작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부디 영화를 먼저 보고 읽으시기를 바란다. &lt;br&gt;&lt;br&gt;1. 새하얀 눈이 쌓인 겨울, 환희가 설산에 오르고 있다. 곧장 환희는 자신의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 풍경을 담는다. 그런 환희를 따라가던 영화는 언덕에 앉은 환희를 바라본 채 프롤로그를 끝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환희가 자신의 강습소(이자 집)으로 돌아와 현상한 사진을 벽에 붙인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순간에 두 장면, 두 공간 사이에 어떤 분리가 일어나는 듯 보인다. 어떤 분리? 물론 단순히 앞쪽의 프롤로그를 환희의 꿈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우리는 환희가 존재했던 ‘바람의 언덕’이라는 공간과 사진 속에 담긴 ‘바람의 언덕’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바람의 언덕이라는 공간이 나오는 것은 영화의 시작과 끝, 단 두 장면이 전부이다. 이때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은 오직 환희(혹은 마지막에 함께 등장하는 영분)뿐이다. 이 공간은 단순히 하나의 메타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언덕은 환희가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공간. 도시를 벗어난 자연. 물론 그렇다고 환희가 도시 속에서 눈에 보이는 수많은 관계에 둘러싸여 살지는 않지만 도시라는 공간은 환희가 그녀 자체로서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필라테스 강사로서 수강생을 모집하고 가르치며 그 관계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존재를 위한 관계의 연속. 환희는 그 관계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아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환희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던가? 관계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지만 환희에게는 이러한 관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없었다. 오직 그녀 스스로 이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바람의 언덕은 이러한 모든 관계성이 배제된 채 환희의 온전한 존재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리고 환희는 이 공간을 자신의 사진 속에 담아낸다. 사진 속에 담긴 바람의 언덕은 더 이상 하나의 공간이 아닌 환희의 존재성 그 자체로서 변환된다. 메타포의 이미지. 이미지로서의 메타포. 이때 이 이미지에 담긴 것은 바람의 언덕의 공간만이 아닌 환희 그녀자신이다. 환희가 찍은 것은 단순한 겨울 풍경이 아닌 그녀 자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실존이자 존재성이다. 그러니 &amp;lt;바람의 언덕&amp;gt;이라는 제목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공간이 아닌 환희 그 자체이다. 이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간다면 왜 영화가 바람의 언덕에서 시작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환희를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그녀자신뿐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기억이나 사건이 있지 않다. 영화는 인물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을 생각이 없다. 대신 첫 장면에서 그 모든 사건을 자신의 육체와 기억 속에 함축하고 있는 인물의 존재 그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는 환희의 불행을 전시하거나 불행의 원인을 찾아 도덕적 비난을 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이 사건과 기억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세계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물이 세계 속에서 버틸만한 힘을 부여하는 공간이 바람의 언덕이다. 언뜻 보면 환희는 매우 고독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 고독 안에서도 실존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건 아무 전화도 오지 않은 휴대폰으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그녀에게 영분이 찾아올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 하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과거. 이 만남은 지금까지 환희가 겪어왔던 관계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실존의 성장통.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의 도래. 이때부터 바람의 언덕에 있었던, 사진 속 공간에 있었던 환희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영화가 첫 장면에 환희를 등장시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소녀가 앞으로 전혀 새롭게 태어날 것을 미리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lt;br&gt;&lt;br&gt;2. 영분은 환희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분명한 사실이다. 함께 동거하던 남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태백으로 간 것은 자신의 동생 윤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결혼을 여러 번 했다는 그녀에게도 함께 살았던 윤식이라는 남자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음에도)그녀에게 큰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윤식의 부재는 삶의 거대한 공백으로 다가온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동생을 찾아갔으나 그곳에는 동생이 아닌 환희에 대한 소식이 담긴 편지만이 남아있다. 사실 환희도 영분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아이러니한 상황. 관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또 다른 거대한 공백을 마주한다. 어떤 공백? 끝내 책임지지 못했던 과거. 모성의 죄책감. 영분은 이걸 마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관계가 사라졌을 때 이를 대체하는 것이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이다. 영분이 환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영분이 찾아간 자리에는 자신이 의지 할만한 새로운 관계가 아닌 자신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동시에 실존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 영분은 환희보다 먼저 이 순간을 만나게 된다. 아니, 차라리 환희는 애초부터 이를 마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환희가 자신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고 한들 그녀는 이미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바람의 언덕에서 보여줬다. 하지만 영분은 그렇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그녀가 의존할 수 있을만한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 아마도 영분이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은 환희를 버렸다는 과거의 근원적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에게로 도망치기 위한 과정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가 결혼을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온전하게 의존 할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영분에게, 자신의 동생과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이제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 대신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실존하는 삶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근원지를 찾아온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이 잊어버리고자 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과거는 잊힐지 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영분은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과거의 죄책감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해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마치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오이디푸스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 영분은 아직 이를 받아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동생에게서 받은 환희의 명함을 버리고 가버린다. 하지만 카메라는 영분이 버린 명함을 쫓아가 아주 가까이서 담아낸다. 마치 영분이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다음날 영분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다리 위에서는 택시 기사 윤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난해한 인물. 아마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기억해낼 것이다. 윤식은 영분과 얼마 전까지 함께 살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 남자의 이름이다. 그런데 윤식이라는 이름을 한 남자가 다시 등장한다. 그저 흔한 이름이니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영분과 술을 마시면서 윤식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분명 영분은 자신과 동거하던 윤식을 떠올리는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윤식이라는 택시 기사는 마치 영분과 함께 살던 윤식이 유령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왜 돌아와야 했을까? 혹시 영분이 아직 윤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윤식에 대한 애도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에서라면 택시 기사 윤식은 영분의 환상으로 끝나야 하지만 택시 기사 윤식은 분명 영화 안에서 실존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영분은 윤식과 확실하게 작별을 고하듯이 집을 떠날 당시 윤식이 투병했던 것처럼 보이는 침대에 작별인사를 남겼다. 이 유령은 영분이 소환한 유령이 아닌 영화가 영분을 위해 보낸 유령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보낸 것일까? 혹은 무엇이 영화로 하여금 이 유령을 보내도록 만든 것일까? &lt;br&gt;&lt;br&gt;3. 윤식이라는 인물은 이상하리만큼 영분에게 포용적이다. 영분이 다리 밑에 버린 환희의 명함을 되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는 동안에도 도망가지 않고 그녀를 기다린다. 그 후에 영분이 환희와 처음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갑자기 영분이 늦은 밤에 배가 고프다고 하자 함께 식당을 찾아 밥을 먹기도 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 다음부터이다. 영화에서 영분이 환희를 제외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윤식이 유일하다. 영분이 윤식과의 대화에서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아닌)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과거가 아닌 이에 대한 회상이라고 말했다.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실재를 마주하는 것이지만 회상을 마주하는 것은 표상을 마주하는 일이다. 표상은 해석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는 순간 표상의 변화가 나타난다(오이디푸스가 경험하는 것도 사건의 변화가 아닌 사건에 대한 표상의 변화가 아니던가?). 윤식이 영분과의 대화를 통해 유도하는 것은 이러한 표상의 변화이다. 해석의 차이. 과거에 대한 회상의 변화. 영분은 윤식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이야기한다. “나는요, 되돌리고 싶어요. 나는 되돌리고 싶어.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하는 말. “아오, 억울해”. 여기서 영분은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읊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겪었던 과거에 대한 현재 자신의 회상만이 남아있다. 그러자 윤식이 말한다. “억울하기 뭐가 억울해. 사람은요, 그 나이대 진실이 있어”. 그때의 진실. 여기서의 진실은 진리나 실재와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런 과거의 선택조차 긍정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그것이 진실이 될 때 비로서 과거는 전혀 다른 회상을 통해 다가올 것이다. 윤식은 영분에게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표상을 마주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표상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건 영분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표상을 돌파해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에서야 표상의 이면에 숨어있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건 영분의 과거를 감싸고 있던 표상이 영분으로 하여금 실체로부터 계속 멀어지도록 만드는 부정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영분이 겪고 있는 문제는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표상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영분이 그 실체를 몸소 자신의 삶 안에서 긍정할 수 있을 때 비로서 가능하다. 표상을 마주하는 것. 마주한 표상을 돌파해 나가는 것. 그러면서 그 뒤에 숨겨진 실체를 긍정하는 것. 그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표상을 원동력으로 삼아 실존의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를 알려주는 인물의 이름이 윤식인 것도 영화가 영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의 이름을 빌려 그녀에게 사건 자체가 아닌 기억을 마주하도록 제안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영분과 윤식 사이에 무슨 일이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윤식에 대해 매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때 남아있는 것은 윤식이라는 남자에 대한 영분의 회상이 전부이다.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남자가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듯이 영분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다시 해석되고 긍정할 수 있기를 영화는 바란다. 그래서인지 일분, 이분, 삼분이 아닌 영분이라는 이름조차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윤식과 대화를 하던 영분은 자신의 합창단 시절을 언급하며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 순간이 특별한 것은 영분이 자신의 과거를 몸소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현은 더 이상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과거 자체를 마주할 때 비로서 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떠한 해석도 없다. 표상의 흔적들을 치워내자 실체가 그 자리에 드러난다. 영분은 그저 그때처럼 노래하고 있다. 윤식은 그 앞에서 그녀의 무대를 감상하고 있다. 이전까지 영분과 윤식을 각각 원 샷으로 번갈아가며 찍던 카메라는 노래하는 영분과 감상하는 윤식을 한 프레임 안에 투 샷으로 담아낸다. 노래가 끝나자 윤식은 박수를 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난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퇴장한다. 유령의 임무는 끝났다. 영분은 이제 과거를 긍정하고 이 세계에서 홀로 버틸 수 있는 법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영분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lt;br&gt;&lt;br&gt;4. 환희와 영분은 갑자기 만난다. 정말 아무 준비도 없이 서로 만난다. 영분은 환희가 일하는 강습소에 찾아갔지만 앞에서 서성일 뿐이다. 그때 환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다. 대면의 순간. 이때 문제는 무엇인가? 환희는 영분을 강습소에 찾아온 손님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영분은 손님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마주하기 위해 온 것이다. 불균형한 상황. 이때 상황의 간극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둘 사이의 정보의 격차가 아니다. 영분은 자신을 필라테스 수강생으로 생각하는 환희에게 자신이 여기 온 진짜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환희의 규정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간극이 나타나는 곳은 환희와 영분 사이가 아닌 영분 자신에게 있다. 환희가 규정한 정체성. 영분 자신이 되고자 하는 정체성. 둘은 공존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희와 있을 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 사이에서 영분은 환희가 규정해준 정체성을 선택한다. 이제부터 영분과 환희는 필라테스 선생과 수강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한다. 한 가지 반론. 영분은 환희에게 표면적으로만 수강생인 척하고 그 뒤에서는 어머니처럼 행동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본인이 직접 환희의 필라테스 학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나요? 우리는 여기서 이면 대신 표면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영분의 목적이 오직 딸과의 재회라면 그냥 환희에게 자신이 엄마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에도 가장 쉬운 길을 버리고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선택의 이유를 표면에서 찾아야 한다. 영분이 환희를 위해 몰래 해주는 일은 선생과 수강생의 관계 안에 종속된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분은 자신과 환희의 관계를 오로지 선생과 수강생이라는 관계 안에 가두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걸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근원적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한 퇴행적 행위라고 보면 안 된다. 이 행위에는 영분의 모성애 역시 계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때의 모성애는 단순히 딸에 대한 소유욕이 아닌 자신의 딸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버텨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영분이 돕고 있는 인물은 필라테스 강사도, 자신의 딸도 아닌 필라테스 강사로서의 딸이다. 두 가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딸이라는 존재는 어머니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어머니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딸에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삶에서 또 다른 수사가 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순간부터 딸은 어머니에게서 자립하여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여기서 모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전까지 이어지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붙잡는 것이 아닌 자신과 독립적으로 살아가야할 개인에게 본인만의 방법으로 힘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와 딸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개인은 그 성장통을 오롯이 겪어야 한다. 게다가 영분은 과거에 이미 환희와 맺을 수 있었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던가? 영분 자신도 이미 포기한 관계에 대해서 자격을 요구할 생각이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딸이 이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을만한 힘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건 영분이 이미 다른 곳에서 배운 것이 아니던가? 윤식이라는 유령에게서, 영화가 보낸 유령의 가르침을 (물론 방법 자체는 다르지만)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으니 그 가르침을 딸에게도 알려줄 차례이다. 그래서인지 영분이 자신이 버린 환희의 명함을 찾는 장면은 영분 본인이 아닌 윤식이 시킨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당신의 딸을 포기하나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딸을 만나야 해요. 그래야만 당신의 딸도 함께 나아갈 수 있어요. 영분은 그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은 하나의 선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선택을 마주할 때가 왔다. &lt;br&gt;&lt;br&gt;5. 영분과 동거하던 용진은 수소문 끝에 영분에게 찾아왔다. 영분에게 상속재산포기 청구서에 인장을 받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용진의 큰 아버지는 가족도 아닌 영분이 윤식의 재산을 상속 받는 것이 불쾌한 것 같다. 영분은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용진은 이걸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용진의 도착은 그 자체로 어떤 불길함을 가져다 준다. 어째서? 영화 내에서 용진은 가장 나약한 인물이다. 영분이 처음 보이던 모습처럼 의존적인 인물. 용진은 과거 자신이 기댈 수 있던 그 관계의 연장을 위해 찾아왔다. 영분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 용진과의 관계의 청산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건 무엇과 유사한가? 영분은 과거 자신이 환희에게 했던 행위를 용진에게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던 그때처럼, 용진에게서 도망치는 영분. 다시 한번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부인한다. 부인하는 것은 곧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언제든지 회귀하기 마련이다. 용진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환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의 학원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허가 범위 밖까지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영분이 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환희는 처음 듣는 일이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갔더니 정말 수많은 포스터가 자기도 모르는 새 붙여져 있다. 당황하며 포스터를 떼어내던 환희는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는 영분을 발견한다. 아마 누군가는 영분이 그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이런 사건이 생길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물이다. 왜 그런가? 혹시 영분이 자신 안에 품고 있던 괴리가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영분의 모성애가 지나치게 발현된 것일까? 내가 질문하고 싶은 점은 이 장면이 영분과 용진이 만나는 장면과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배치 안에서 유사성을 찾아야 한다. 이 장면들 안에서 영분과 환희가 각각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분은 용진을 찾은 적인 한 번도 없다. 윤식과 달리 용진은 영분에게 스쳐가는 한 명의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영분은 용진에게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곳은 영분 뿐이다. 이때 영분이 깨닫는 것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끼치고 있던 힘의 실체이다. 어떤 힘? 용진에게는 영분의 모성애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영분은 용진의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생물학적, 혹은 사회학적인 대답에 불과하다. 용진에게 있어 영분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영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진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의지 바깥의 모성. 의지에서 벗어난 모성. 물론 영분은 이러한 모성을 이미 어린 시절 환희에게서 경험한 바가 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된다고 자동적으로 모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의지하지 않았던 모성. 영분은 스스로 그 모성을 포기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환희에 대한 모성은 영분이 분명하게 인식하였지만 용진에 대한 모성은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타났다. 인식의 문제는 곧 책임에 대한 윤리적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영분이 환희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은 영분 자신이 환희를 향한 모성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희에 대한 모성을 영분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포기했다. 그녀의 의지는 곧 자신이 짊어질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의지와 인식이 행위에 작동했기 때문에 영분에게 책임에 대한 명분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용진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모두 결여되어 있다. 사실상 영분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용진을 그녀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때 용진의 입을 빌려 영화는 영분에게 질문할 것이다. 당신이 떠나면 이 나약한 남자는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때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모든 행위와 과거에 대해서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대에는 한계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를 &amp;lt;바람의 언덕&amp;gt;은 책임의 윤리적 문제와 함께 질문하고 있다. 환희의 문제로 넘어가보자. 환희는 자신 몰래 포스터를 붙이는 영분을 발견하고 영분이 자신이 그토록 찾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환희가 왜 이를 대면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환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관객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전화이다. 표면적으로 이 전화는 허가 범위를 벗어난 포스터를 떼라고 통보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게 이 전화는 환희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알려주는 전화인 것만 같다. 너의 어머니가 지금 여기 있어. 빨리 와서 만나봐. 왜 알려주어야 하는가? 영분이 포스터를 몰래 붙이는 것은 자신의 딸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힘을 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환희가 이 힘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이 관계는 딸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 관계가 아닌 어머니와 딸의 호혜적 관계로 탈바꿈한다. 대상에서 주체로의 성장. 영화는 환희를 일방적으로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는 인물로 만들 생각이 없다. 인식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환희는 단지 좋은 수강생이라고 생각했던 영분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때의 관계는 이전까지의 상투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라테스 강사와 수강생으로서 맺은 관계는 서로에 대한 표상을 관계성 안에 가두는 작업이었다. 표상들의 관계. 이 표상의 껍데기를 뚫어내고 실재가 들어나고 있다. 영분 자신이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실재. 두 장면에서 공통점은 영분과 환희 모두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던 힘을 발견하면서 관계의 상투성 이면에 숨어있던 관계의 실재와 마주한다는 것이다. 표층을 뚫어낸 심층. 심연을 마주한 자들. 우리는 이미 환희가 영분에게 자신의 실존이 담긴 바람의 언덕 사진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여기서부터 둘 사이의 상투적 관계성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환희가 자신의 실재를 주었으니 영분도 맞교환을 해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할 단계이다. &lt;br&gt;&lt;br&gt;6. 환희가 어머니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영분은 (딸이면서)강사와의 만남을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아마 이 표현을 보자마자 이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의 괴리. 이제 괴리는 영분에게서 영분과 환희 사이로 자리를 옮긴다. 환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하나는 지금 둘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표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럼 두 모녀는 삶의 끝까지 서로를 필라테스 강사와 수강생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건 영분이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또 다른 선택. 표상을 걷어내고 실재와 마주하는 것. 그때부터 두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환희는 후자를 선택한다. 영분과의 수업은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영분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고 환희는 그런 영분을 뒤에서 바라본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숨이 막히자 비닐봉지에 숨을 뱉어낸다. 이미 우리는 환희가 숨이 막히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환희의 숨이 막힐 때는 모두 관계의 무게에 짓눌리는 순간들이다. 관계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실존의 고독. 그 고독이 그녀의 숨통을 조인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관계들이 모두 표상들 간의 관계였다면 이제는 실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어머니라는 실재. 딸이라는 실재. 실재들 간의 관계. 이 관계는 표상들 간의 관계보다 훨씬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누를 것이다. 영분이 이 실재를 외면한 것도 이 무게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건 자신만이 아니라 딸 역시 그 무게를 견디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신과 딸의 관계를 끝까지 표상 안에 가둬 두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실재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내 딸이 발견했다. 그걸 발견한 딸은 거의 발작을 일으키면서 쓰러진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무게. 환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영분은 이미 떠난 상태이다. 자신의 딸이 쓰러지는데도 도와주기는커녕 매정하게 떠나는 어머니.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과 딸의 관계를 다시 표상의 상투적 관계로 회귀시키는 것 역시 아니다. 한 번 실재를 마주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영분의 모성은 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 딸이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영분 자신 역시 딸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실존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니까 딸을 위해 내린 선택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도와주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배반하는 것이다. 어떤 배반? 환희를 도와주는 순간 어머니와 딸의 종속적 관계가 형성되고 지금껏 둘을 규정하던 선생님과 수강생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진다. 그건 영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다시 반복. 어머니와 딸의 관계. 그리고 수강생인 어머니와 선생님인 딸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영분은 모녀의 관계 안에 또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실재가 나타날 때 남는 것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뿐이다. 영분은 이를 거부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이 모성은 드러나는 순간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식이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종속적 관계 또한 회피할 수 있다. 환희는 이제 그 무게를 스스로 견뎌야 한다. 환희를 떠난 영분 앞에 용진이 다시 나타난다. 떠난 줄 알았던 용진은 아직 그녀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용진은 영분이 직접 도장을 찍은 상속재산포기 청구서를 직접 찢고 영분에게 묻는다. “우리 아빠 진짜 좋아는 하셨어요?” 이 말의 번역본. “나는 잊어버린 건가요?” 영분의 대답. “모르겠어. 잊어버렸어”. 단호한 대답에 용진이 한탄한다. “그러시구나”. 영분이 반박하듯이 묻는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되니?” 그러자 용진이 재반박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돼요?” 두 질문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영분은 용진과 윤식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어하지만 용진은 그녀를 놔 줄 생각이 없다. 그의 삶은 영분에게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영분은 다시 한번 실재와 마주한다. 어떤 실재? 자신도 몰랐던 모성의 실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용진을 살게 해주었던 모성. 과연 이 모성을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질문. 영분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저 멀리서 환희가 오고 있다. 두 개의 모성. 두 명의 (불완전한)자식. 어떻게 이들을 품에 안을 것인가의 문제. &lt;br&gt;&lt;br&gt;7. 용진과의 대화 이후 영분은 떠날 준비를 한다. 그녀는 용진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일까? 돌아가는 길에 영분은 자신이 그동안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모두 떼어낸다. 모성의 흔적을 지우는 어머니. 딸은 그런 어머니가 남긴 흔적을 따라 어머니를 쫓아간다. 그리고 다리 위, 영분이 환희의 명함을 되찾은 장소에서 딸과 어머니가 만난다. 환희가 포스터를 떼어내는 영분을 말리자 영분이 말한다. “버리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환희와의 모녀 관계를 다시 포기하고 싶은 영분.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환희가 여러 번 묻는다. “왜 그래요?” 영분이 반박한다. “넌 왜 그래? 여기서 뭐 하세요 선생님?” 그러자 환희가 대답한다. “엄마. 엄마잖아. 맞잖아”. 처음으로 엄마를 부르는 딸. 하지만 엄마는 딸을 부를 생각이 없다. 아니, 딸이 부디 선생님으로서 남기를 바란다. 계속 자신을 위악적으로 대하는 엄마에게 환희가 질문한다. “이럴 거면 왜 왔어?” 영분은 이상한 대답을 내놓는다. “나 같이 살던 사람이 죽었거든. 그래서 돈이 필요해. 돈 좀 줘라. 한 번만 줘. 그럼 다신 널 찾아오지 않을게”. 하지만 영분도 환희가 돈을 빌려줄 수 있을만한 사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건 자신과 환희의 관계를 채무 관계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모녀가 종속된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채무는 무의미하다. 그건 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영분이 지속적으로 자신과 딸의 관계를 상투적 모녀 관계로부터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나타나 있다. 같은 메커니즘의 다른 방법. 하지만 환희는 말한다. “나는 보고 싶었어요”. 이 말 한마디에 영분의 노력은 무너진다. 아니,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자 영분이 방법을 바꾼다. “난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너 때문에 나는 평생 나쁜 사람으로 살아야 돼. 아 끔찍해. 아 갑갑해. 난 억울해”. 영분은 호소하듯이 울먹이며 말한다. 이 말은 오해 받기 쉬워 보인다. 여기서 영분은 자신이 겪은 불행의 책임을 무고한 딸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분이 가리키는 것은 환희가 아닌 원치 않게 환희를 낳았던 과거의 사건 자체이다. 모성의 죄책감. 근원적 죄책감.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환희의 뒤를 받쳐준 것이다. 하지만 그 모성이 드러난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떠나는 것뿐이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 딸이 본인의 삶을 살도록. 이 말을 들은 환희의 대답. “나는 안 미워. 한 번도 안 미웠어. 난 어떻게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엄마 나 낳을 때 나보다 어렸잖아. 나 어른이야”. 아이와 어른의 차이. 어른은 아이가 책임질 수 없는 것도 책임질 수 있는 주체이다. 환희는 이제 자신도 엄마처럼 어른이니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은 어른이니 책임질 수 있다는 말에는 그때는 어렸으니 아무 책임도 없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사건에 대한 책임의 부재. 책임이 사라지는 순간 영분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해진다. 환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분은 분명하게 대답한다. “아니야. 미안해. 나도 살고 싶어”. 이 한마디에 더 이상 환희는 반박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명징한 대답. 이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살고 싶다. 그리고 살기 위해 떠난다. 영분은 위악적인 태도 뒤에 숨겨오던 자신의 진심을 드러낸다. 또 다른 실재. 살고자 하는 실존의 초상. 영화가 궁극적으로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 영분은 자신의 실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책임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것이 영분의 윤리이다. 환희는 떠나는 어머니를 조용히 지켜본다. &amp;lt;바람의 언덕&amp;gt;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녀 사이의 상투적 관계 자체가 아닌 그 관계를 견뎌야 하는 실존의 모습을 묵묵히 주시하기 때문이다. 다리 위에서 두 모녀의 대화를 한 프레임 안에 잡지 않고 각각의 얼굴을 원 샷으로 담아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떠나는 영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환희는 그걸 깨달은 것만 같다. 이제 영분은 떠났지만 그녀는 용진 곁에 없다. 용진은 홀로 집에 돌아온다. 왜 영분은 용진과 함께 가지 않은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용진은 영분과 함께 할 수 없다.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환희가 다시 바람의 언덕을 찾았다. 첫 장면에서와 달리 눈이 녹아 땅이 드러난 상태이다. 봄이 오고 있다. 환희는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만끽한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그녀의 정면에서 응시한다. 우리는 카메라가 환희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장면을 이미 한 차례 보았다. 처음 어머니가 자신 대신 붙여놓은 포스터를 발견하는 순간. 두 장면은 모두 자신의 삶이 바뀌는 전환점을 환희가 마주하는 순간의 얼굴을 찍었다. 어머니를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나를 마주하는 순간. 이제 환희의 얼굴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길을 가던 환희는 언덕에 앉아 있는 어머니와 만난다. 이 장면은 현실일까? 아니면 환희의 꿈이나 환상일까? 나는 차라리 세 번째 답을 제시하고 싶다. 이건 환희와 영분의 내면적 진실이다. 영화는 모녀의 만남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별과 만남 사이에 나타나는 비약을 숨기지 않는다(이와 반대로 영분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 하던 용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것과 비교해보라). 이때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람의 언덕이다. 실존이 드러나는 곳. 존재의 충만함으로 가득한 곳. 그 장소에 영분 역시 들어와 있다. 그건 영분이 환희에게 바람의 언덕 사진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실존의 맞교환. 서로의 실존은 서로의 삶에 들어온다. 이것이 환희와 용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용진은 영분에게 의존할 뿐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마주하는 것이나 영분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용진은 바람의 언덕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용진의 삶에는 더 이상 영분이 자리잡을 수 없다. 마치 칸트의 정언 명령 중 인간성 명령을 실현시키는 듯한 대목. 영분의 모성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용진과 달리 환희는 영분의 삶과 실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용진의 곁에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용진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어떻게 되돌아 오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그 두 가지 방식 사이에서 영화는 환희의 방식을 지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엄마의 곁에 앉은 환희. 이윽고 영분이 입을 연다. “나 너무 무서워”. 환희도 대답한다. “나도”. 새로운 시작. 언제나 두려운 일. 아직 바람의 언덕에는 우리가 영화 포스터에서 보았던 따스한 봄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영화가, 혹은 우리가 간절하게 꾸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봄은 언젠간 온다는 것이다. &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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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박석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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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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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3 Apr 2021 13:19: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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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리바이어던 리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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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span&gt;&amp;ldquo;&lt;/span&gt;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lt;span&gt;. &lt;/span&gt;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lt;span&gt;. &lt;/span&gt;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lt;span&gt;&amp;rdquo;(&lt;/span&gt;욥기 &lt;span&gt;41&lt;/span&gt;장 &lt;span&gt;31&lt;/span&gt;절&lt;span&gt;~33&lt;/span&gt;절&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1. &lt;/span&gt;먼저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lt;span&gt;.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 &lt;/span&gt;성경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lt;span&gt;. &lt;/span&gt;기독교 칠죄종 중 하나인 질투를 상징하는 악마&lt;span&gt;. &lt;/span&gt;혹은 토마스 홉스의 그 유명한 저서&lt;span&gt;. &lt;/span&gt;절대 군주의 상징&lt;span&gt;. &lt;/span&gt;아마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전설에 따르면 리바이어던&lt;span&gt;(&lt;/span&gt;레비아탄&lt;span&gt;)&lt;/span&gt;은 타락천사 루시퍼의 창조물로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을 폭풍우를 일으켜 죽이거나 타락 시킨다고 한다&lt;span&gt;. &lt;/span&gt;토마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창조한 국가라는 괴물을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했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lt;span&gt;&amp;lsquo;&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rsquo;&lt;/span&gt;은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물론 여기에 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러면 이 제목은 메타포인가&lt;span&gt;? &lt;/span&gt;만약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메타포인가&lt;span&gt;? &lt;/span&gt;아마 가장 쉬운 방법은 바다를 리바이어던으로 환원하는 은유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lt;span&gt;. &lt;/span&gt;바다는 그저 어둡고 거칠 뿐&lt;span&gt;, &lt;/span&gt;괴물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바다는 자신의 존재양식대로 존재할 뿐 어부들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아마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lt;span&gt;. &lt;/span&gt;조금 더 밀고 들어가보자&lt;span&gt;. &lt;/span&gt;리바이어던이라는 전설 속 괴물과 이 영화가 공유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lt;span&gt;. &lt;/span&gt;바다라는 공간&lt;span&gt;. &lt;/span&gt;그리고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과 그 선박 위에서 노동을 이어가는 어부들&lt;span&gt;. &lt;/span&gt;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이 개념들을 구분하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완전히 구분되어 보이는 이 개념들은 영화 안에서 생생하게 하나의 실체로서 묶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반문&lt;span&gt;. &lt;/span&gt;그 개념들을 하나로 묶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어떻게 서로 다른 개념이 마치 삼위일체처럼 하나의 실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lt;span&gt;? &lt;/span&gt;아마 지금쯤 당신은 내가 개념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바다라는 개념&lt;span&gt;. &lt;/span&gt;선박이라는 개념&lt;span&gt;. &lt;/span&gt;어부라는 개념&lt;span&gt;. &lt;/span&gt;이 개념들은 물론 영화 안에서 분명하게 실재하고 실존하고 있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것들을 실재화 시키는 실존양식이다&lt;span&gt;. &lt;/span&gt;바꿔 말하자면 어떻게 실존하는가의 문제&lt;span&gt;. &lt;/span&gt;영화 안에 이 개념들을 하나의 실재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어쩌면 이 질문은 이렇게도 가능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우리가 영화에서 실제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영화는 지금 무엇을 찍고 있는가&lt;span&gt;? &lt;/span&gt;질문이 이렇게 바뀌는 순간 하나의 대답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lt;span&gt;. &lt;/span&gt;영화 내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노동이다&lt;span&gt;. &lt;/span&gt;그렇다&lt;span&gt;.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lt;/span&gt;은 노동을 찍은 영화이다&lt;span&gt;. &lt;/span&gt;이때 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lt;span&gt;.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lt;/span&gt;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노동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노동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게 목적이라면 영화는 인간의 노동만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면 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영화에는 인간의 노동만이 아닌 다른 노동이 함께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어떤 노동&lt;span&gt;? &lt;/span&gt;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의 노동&lt;span&gt;. &lt;/span&gt;그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활동하는 바다의 노동&lt;span&gt;. &lt;/span&gt;그러니 이 노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적 의미로 읽을 수는 없다&lt;span&gt;. &lt;/span&gt;여기서의 노동은 세계가 활동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운동과도 같은 것이다&lt;span&gt;. &lt;/span&gt;노동이라는 운동&lt;span&gt;. &lt;/span&gt;운동하는 세계&lt;span&gt;. &lt;/span&gt;이 운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lt;span&gt;. &lt;/span&gt;바다는 바다의 방식으로&lt;span&gt;, &lt;/span&gt;선박은 선박의 방식으로&lt;span&gt;, &lt;/span&gt;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로 노동한다&lt;span&gt;. &lt;/span&gt;노동의 분유&lt;span&gt;. &lt;/span&gt;분유되는 운동&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lt;span&gt;&amp;lsquo;&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rsquo;&lt;/span&gt;이란 바로 이 노동 자체&lt;span&gt;, &lt;/span&gt;그리고 노동이라는 운동을 통해 유지되는 세계 그 자체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괴물&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2.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lt;/span&gt;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촬영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두 가지 방식&lt;span&gt;. &lt;/span&gt;먼저 이 영화에서 촬영은 시종일관 너무 피사체에 가깝게 다가간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그물을 걷어내고 잡은 물고기들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지나치리만큼 가까이서 담아낸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영화 내내 어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다&lt;span&gt;. &lt;/span&gt;어부들의 대화도 수많은 소음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lt;span&gt;.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lt;/span&gt;은 어부들에게는 관심이 없다&lt;span&gt;. &lt;/span&gt;유일한 관심은 그들의 노동뿐이다&lt;span&gt;. &lt;/span&gt;손들의 노동&lt;span&gt;. &lt;/span&gt;노동하는 손&lt;span&gt;. &lt;/span&gt;노동으로서 살아 숨쉬는 인간&lt;span&gt;. &lt;/span&gt;여기에는 인간의 노동만이 있지 않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바다와 선박의 노동까지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어떻게&lt;span&gt;? &lt;/span&gt;두 번째 방법&lt;span&gt;. &lt;/span&gt;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캐스팅&lt;span&gt;-&lt;/span&gt;테일러는 선박 바깥쪽에 카메라를 달아놓았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lt;span&gt;? &lt;/span&gt;바다의 거친 파도에 따라 흔들리는 선박의 움직임&lt;span&gt;. &lt;/span&gt;바다의 안과 밖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카메라&lt;span&gt;. &lt;/span&gt;격렬하게 느껴지는 선박의 운동&lt;span&gt;. &lt;/span&gt;그 선박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고기의 피와 시체&lt;span&gt;, &lt;/span&gt;그리고 부산물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인간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이 노동을 밀착해서 찍는다&lt;span&gt;. &lt;/span&gt;이러한 노동은 선박 위에서도 펼쳐진다&lt;span&gt;. &lt;/span&gt;손질된 물고기의 시체와 그물에 걸려 함께 올라온 부산물들이 바닥에 버려지고 곧 바다로 떠내려간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바다에 버려진 부산물들은 바다로 되돌아가거나 수많은 새떼가 먹어 치운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순환&lt;span&gt;. &lt;/span&gt;하나의 운동&lt;span&gt;. &lt;/span&gt;노동이라는 운동&lt;span&gt;. &lt;/span&gt;인간이 선박 위에서 자신들의 노동을 이어나갈 때 선박 역시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자신의 노동을 이어나간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바다는 인간에게 노동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고 그들의 노동이 남겨놓은 부산물을 처리하며 이 순환을 완성한다&lt;span&gt;. &lt;/span&gt;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순환&lt;span&gt;. &lt;/span&gt;거대한 괴물 같은 운동&lt;span&gt;. &lt;/span&gt;이때 이 순환을 이루는 운동들은 하나를 이루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한 장면&lt;span&gt;. &lt;/span&gt;한 마리의 새가 선박 위로 들어온다&lt;span&gt;. &lt;/span&gt;아마 선박 위에 있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 온 것 같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이 새에게 아주 밀착하여 다가간다&lt;span&gt;. &lt;/span&gt;잠시 바닥을 살펴보던 새는 앞쪽에 세워진 판자를 넘어가려고 한다&lt;span&gt;. &lt;/span&gt;이 판자를 넘어가면 어부들이 노동하는 장소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먹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경계&lt;span&gt;. &lt;/span&gt;새는 판자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판자를 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물론 이 과정을 카메라는 아무 개입도 없이 지켜볼 뿐이다&lt;span&gt;. &lt;/span&gt;결국 새는 이를 포기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lt;span&gt;. &lt;/span&gt;물론 영화에서 이 장면만을 인위적으로 연출했을 리는 없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은 돌이켜봐도 굳이 영화에 넣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장면이다&lt;span&gt;. &lt;/span&gt;그럼에도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캐스팅&lt;span&gt;-&lt;/span&gt;테일러는 영화에 이 장면을 포함시켰다&lt;span&gt;. &lt;/span&gt;그것도 아주 가까이서&lt;span&gt;, &lt;/span&gt;아주 길게&lt;span&gt;, &lt;/span&gt;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lt;span&gt;. &lt;/span&gt;우리는 왜 새가 판자를 넘지 못하는 지가 아닌 이 장면이 영화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lt;span&gt;. &lt;/span&gt;일종의 메타포&lt;span&gt;. &lt;/span&gt;은유로서의 작용&lt;span&gt;. &lt;/span&gt;새가 어부들의 장소에 들어가는 순간 이건 단순히 새 한 마리가 선박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 순간 바다의 노동은 인간의 노동에 개입하는 것이고 분유 되어 있던 운동의 순환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lt;span&gt;. &lt;/span&gt;이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 되어야 한다&lt;span&gt;. &lt;/span&gt;조금 쉽게 얘기해보자&lt;span&gt;. &lt;/span&gt;바다의 운동이 지나치게 과해지는 순간&lt;span&gt;(&lt;/span&gt;예컨대 폭풍우나 해일&lt;span&gt;) &lt;/span&gt;인간에게는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lt;span&gt;. &lt;/span&gt;또한 선박의 운동이 멈춘다면 당연히 인간의 노동도 멈출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운동이 멈추는 순간 다른 노동은 함께 멈추거나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왜 하필 그 장면을 통해 이 말을 해야 하는가&lt;span&gt;? &lt;/span&gt;대답은 단순하다&lt;span&gt;. &lt;/span&gt;그건 영화에 담기에는 너무 거대하다&lt;span&gt;. &lt;/span&gt;인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지 않는 이상 다큐멘터리에서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span&gt;. &lt;/span&gt;설사 포착한다고 해도 재난이 인간을 파괴하는 그 순간을 영화에 포함시킨다면 그건 시선의 윤리라는 거대한 윤리적 문제와 맞닿아드릴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럴 때 영화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장면을 메타포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영화에 담기에도 거대한 이 운동&lt;span&gt;. &lt;/span&gt;어쩌면 영화가 피사체에 계속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 어마어마한 운동을 한 번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한 번에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은 이 운동이 너무 거대해서 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이 순환 안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야 한다&lt;span&gt;. &lt;/span&gt;분업&lt;span&gt;. &lt;/span&gt;이 단어를 읽는 순간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이 분업의 생산 수단의 소유주는 누구인가&lt;span&gt;? &lt;/span&gt;이 노동의 자본은 누가 소유하는가&lt;span&gt;? &lt;/span&gt;이렇게 질문한다면 요점을 놓친 것이다&lt;span&gt;. &lt;/span&gt;다시 한번&lt;span&gt;. &amp;lt;&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gt;&lt;/span&gt;은 인간만의 노동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lt;span&gt;, &lt;/span&gt;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이 노동은 이 거대한 세계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동력으로서의 운동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이 운동의 주인이 있다면 바로 노동 자신이다&lt;span&gt;. &lt;/span&gt;노동은 자기 자신을 소유하면서 그 중 일부를 필요한 존재들에게 분배한다&lt;span&gt;. &lt;/span&gt;그 안에서 바다와 선박과 인간은&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방식대로 노동하며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뒤집어 얘기하자면 노동은 이 모든 존재들이 필요하지는 않다&lt;span&gt;. &lt;/span&gt;만약 이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 순환을 원래대로 회복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분업의 결정권을 가진 자에게 절대 권력이 존재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반대로 인간을 포함한 세계 내 존재들은 노동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lt;span&gt;. &lt;/span&gt;절대적인 실존 양식&lt;span&gt;. &lt;/span&gt;마치 홉스의 표현과도 같은 거대한 괴물&lt;span&gt;. &lt;/span&gt;인간은 이 실존 양식을 잃어버리는 순간 거대한 절망과 마주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낸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3. &lt;/span&gt;내내 숨막힐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지던 영화가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후반부&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어느 순간부터 한 선원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lt;span&gt;. &lt;/span&gt;착실하게 노동을 이어가는 선원을 따라가던 중 영화는 부감으로 선박 전체를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이 낯선 쇼트&lt;span&gt;. &lt;/span&gt;내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던 카메라가 갑자기 피사체와 거리를 둔다&lt;span&gt;. &lt;/span&gt;위에서 바라본 선박은 누군가가 그 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평온하게 보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다음 쇼트&lt;span&gt;. &lt;/span&gt;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선원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lt;span&gt;. &lt;/span&gt;고된 노동에 지쳤는지 그의 눈에 졸음이 쏟아지고 있다&lt;span&gt;. &lt;/span&gt;선원은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잠에 든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영화는 곧장 다음 쇼트에서 다시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을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왜 이 장면들을 넣어야 했는가&lt;span&gt;? &lt;/span&gt;영화는 한 번도 한 개체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lt;span&gt;. &lt;/span&gt;그저 개인이 수행하는 노동을 찍을 뿐이다&lt;span&gt;. &lt;/span&gt;그런 영화가 처음으로 개체를 찍는 순간은 노동이 잠시 멈춘 순간이다&lt;span&gt;. &lt;/span&gt;그때 어떤 모습이 비춰지는가&lt;span&gt;? &lt;/span&gt;노동을 멈춘 선박은 평온하지만 이전에 느껴졌던 생동감은 보이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노동하지 않는 선박은 의미를 잃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원&lt;span&gt;. &lt;/span&gt;처음으로 영화가 노동을 멈춘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의 모습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잠에 드는 모습이다&lt;span&gt;. &lt;/span&gt;또 하나의 메타포&lt;span&gt;. &lt;/span&gt;노동이 멈추는 순간&lt;span&gt;. &lt;/span&gt;이때 노동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던 존재들은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잃어버린다&lt;span&gt;. &lt;/span&gt;그런 존재들에게 남은 것은 무기력하게 잠&lt;span&gt;(&lt;/span&gt;죽음&lt;span&gt;)&lt;/span&gt;에 드는 것뿐이다&lt;span&gt;. &lt;/span&gt;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인간은&lt;span&gt;, &lt;/span&gt;선박은&lt;span&gt;, &lt;/span&gt;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다시 노동하기 위해 나가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여기서 영화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노동을 끝내고 편히 쉬는 인간이 아니라 노동 없이는 자신의 실존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초상이다&lt;span&gt;. &lt;/span&gt;마치 자연에서 인간이 생존을 위해 창조한 절대권력처럼&lt;span&gt;. &lt;/span&gt;이 역시 영화는 메타포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너무 거대하기 때문에&lt;span&gt;. &lt;/span&gt;이 무시무시한 괴물&lt;span&gt;. &lt;/span&gt;두려우면서도 경외할 수밖에 없는 노동이라는 괴물&lt;span&gt;. &lt;/span&gt;진정한 &lt;span&gt;&amp;lsquo;&lt;/span&gt;리바이어던&lt;span&gt;&amp;rsquo;. &lt;/span&gt;아마 그 선원도 다시 선박을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또 하나의 순환&lt;span&gt;. &lt;/span&gt;혹은 굴레&lt;span&gt;. &lt;/span&gt;잠에서 깨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오늘도&lt;span&gt;, &lt;/span&gt;내일도&lt;span&gt;, &lt;/span&gt;아마 이 괴물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날까지 이 순환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amp;ldquo;&lt;/span&gt;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lt;span&gt;. &lt;/span&gt;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lt;span&gt;. &lt;/span&gt;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lt;span&gt;. &lt;/span&gt;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족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꽃을 수 있겠느냐&lt;span&gt;. &lt;/span&gt;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lt;span&gt;. &lt;/span&gt;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lt;span&gt;. &lt;/span&gt;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lt;span&gt;. &lt;/span&gt;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lt;span&gt;&amp;rdquo;(&lt;/span&gt;욥기 &lt;span&gt;41&lt;/span&gt;장 &lt;span&gt;4&lt;/span&gt;절&lt;span&gt;~11&lt;/span&gt;절&lt;span&gt;).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category>리바이어던</category>
      <category>리뷰</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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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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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0 Feb 2021 14:35: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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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워터 릴리스 리뷰</title>
      <link>https://filmandday.tistory.com/41</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O7x8M/btqUeW4NWhy/QGYTGCKk4987hMu409Dpw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O7x8M/btqUeW4NWhy/QGYTGCKk4987hMu409Dpw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O7x8M/btqUeW4NWhy/QGYTGCKk4987hMu409Dpw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O7x8M%2FbtqUeW4NWhy%2FQGYTGCKk4987hMu409DpwK%2Fimg.jpg&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1. &lt;/span&gt;두 소녀가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lt;span&gt;. &lt;/span&gt;흐르는 침묵을 깨며 마리가 입을 연다&lt;span&gt;. &amp;ldquo;&lt;/span&gt;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는 건 천장 같아&lt;span&gt;. &lt;/span&gt;생을 마감하는 사람 중 &lt;span&gt;90%&lt;/span&gt;는 그럴 걸&lt;span&gt;. &lt;/span&gt;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 바라보는 천장이 눈 속에 선명히 남을 거야&lt;span&gt;. &lt;/span&gt;마치 사진처럼&lt;span&gt;&amp;rdquo;. &lt;/span&gt;그리고 한 마디 더&lt;span&gt;. &amp;ldquo;&lt;/span&gt;얼마나 많은 천장이 눈 속에 남겨졌을까&lt;span&gt;&amp;rdquo;. &lt;/span&gt;이윽고 플로리안도 말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갑자기 천장이 달라 보인다&lt;span&gt;&amp;rdquo;. &lt;/span&gt;카메라는 천장을 보여주지 않고 컷을 바꾼다&lt;span&gt;. &lt;/span&gt;그 자체로도 이상해 보이는 이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배가시키는 것은 이전 장면과 다음 장면이다&lt;span&gt;. &lt;/span&gt;바로 이전에 마리는 플로리안이 준 수영복을 입으면서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다음 쇼트에서 활기찼던 웃음은 사라지고 침묵을 사이에 둔 채 무거운 대화가 이어진다&lt;span&gt;. &lt;/span&gt;더 이상한 건 다음 장면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의 집을 나온 마리는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온다&lt;span&gt;. &lt;/span&gt;쓰레기 속 휴지의 냄새를 맡고 다 먹은 사과를 베어 물면서 구역질하는 마리&lt;span&gt;. &lt;/span&gt;누가 봐도 도착적인 모습이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들이 흐르는 동안 시간은 밤에서 아침으로 바뀐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드는 의문&lt;span&gt;. &lt;/span&gt;그런 마리는 왜 플로리안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을까&lt;span&gt;? &lt;/span&gt;혹은 영화는 왜 그 사이의 시간&lt;span&gt;, &lt;/span&gt;마리와 플로리안이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을 시간을 건너뛰었을까&lt;span&gt;? &lt;/span&gt;실제로 영화는 마리와 플로리안이 서로의 손을 잡으며 성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컷을 바꾼다&lt;span&gt;. &lt;/span&gt;이 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물론 죽음이라는 말이다&lt;span&gt;. &lt;/span&gt;마리와 플로리안의 세계&lt;span&gt;, &lt;/span&gt;두 소녀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인가&lt;span&gt;? &lt;/span&gt;사회적 규범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난 관계&lt;span&gt;, &lt;/span&gt;억압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세계&lt;span&gt;, &lt;/span&gt;이를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는&lt;span&gt;, &lt;/span&gt;약간은 도식적인 해석을 &lt;span&gt;(&lt;/span&gt;조금 무리해서라도&lt;span&gt;)&lt;/span&gt;영화 깊숙하게 밀고 들어가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꿈꾼다&lt;span&gt;. &lt;/span&gt;그 세계는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일 수도 있고&lt;span&gt;(&amp;lt;&lt;/span&gt;타오르는 여인의 초상&lt;span&gt;&amp;gt; &lt;/span&gt;혹은 &lt;span&gt;&amp;lt;&lt;/span&gt;걸후드&lt;span&gt;&amp;gt;), &lt;/span&gt;다른 성을 가지는 세계&lt;span&gt;(&amp;lt;&lt;/span&gt;톰보이&lt;span&gt;&amp;gt;)&lt;/span&gt;이기도 하다&lt;span&gt;. &amp;lt;&lt;/span&gt;워터 릴리스&lt;span&gt;&amp;gt;&lt;/span&gt;에서 마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 역시 명확하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유토피아는 오래 가지 못한다&lt;span&gt;. &amp;lt;&lt;/span&gt;타오르는 여인의 초상&lt;span&gt;&amp;gt;&lt;/span&gt;의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고작 &lt;span&gt;6&lt;/span&gt;일 동안 허락된다&lt;span&gt;. &amp;lt;&lt;/span&gt;걸후드&lt;span&gt;&amp;gt;&lt;/span&gt;에서 마리엠 역시 친구들과 우정의 시간을 길게 갖지 못한다&lt;span&gt;. &amp;lt;&lt;/span&gt;톰보이&lt;span&gt;&amp;gt;&lt;/span&gt;에서 로레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들키게 되는 순간은 가장 남성성이 강하게 돌출되는 순간&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미카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lt;span&gt;(&lt;/span&gt;로레는 자신이 상상하는 미카엘처럼 다른 남자 아이와 남자처럼 싸우게 된 후 정체를 들킨다&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셀린 시아마는 자신의 인물들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런 세계는 존재할 수도 없고&lt;span&gt;, &lt;/span&gt;존재하더라도 곧 무너진다&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인물들이 원하는 그러한 세계는 천장의 세계&lt;span&gt;, &lt;/span&gt;즉 죽음의 세계이다&lt;span&gt;. &lt;/span&gt;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세계&lt;span&gt;. &lt;/span&gt;물론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본능은 단순히 무&lt;span&gt;(&lt;/span&gt;無&lt;span&gt;)&lt;/span&gt;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죽음본능은 또 다른 방식의 자기보존일 수도 있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셀린 시아마는 죽음뿐 만이 아닌 죽음본능조차 거부한다&lt;span&gt;. &lt;/span&gt;결국 죽음본능조차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렇다고 셀린 시마아가 단순히 에로스적 세계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lt;span&gt;. &lt;/span&gt;인물들은 현실에서는 성적 욕구를 이전처럼 발산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셀린 시아마는 새로운 대안을 선택한다&lt;span&gt;. &lt;/span&gt;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다&lt;span&gt;. &lt;/span&gt;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예술을 통해 서로를 기억하며 이상향을 연장한다&lt;span&gt;. &amp;lt;&lt;/span&gt;걸후드&lt;span&gt;&amp;gt;&lt;/span&gt;는 모든 세계에서 버림받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리엠의 모습으로 끝난다&lt;span&gt;. &lt;/span&gt;로레는 미카엘이라는 허울을 벗고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리사&lt;span&gt;(&lt;/span&gt;진 디슨&lt;span&gt;)&lt;/span&gt;와 마주한다&lt;span&gt;. &lt;/span&gt;셀린 시아마에게 현실의 세계는 회피의 대상이 아닌 수용의 대상인 동시에 투쟁의 대상이다&lt;span&gt;. &lt;/span&gt;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세계에 속한 자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셀린 시아마의 인물들은 젠더적 억압이 만연하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을 지켜내고&lt;span&gt;, &lt;/span&gt;혹은 지켜내기 위해 나아간다&lt;span&gt;(&lt;/span&gt;어쩌면 셀린 시아마는 그것이 영화의 역할이라고 믿는 것만 같다&lt;span&gt;). &amp;lt;&lt;/span&gt;워터 릴리스&lt;span&gt;&amp;gt;&lt;/span&gt;는 이러한 영화적 태도의 원형 같은 작품으로 보인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2. &lt;/span&gt;마리는 왜 수중 발레 팀에 들어간 것일까&lt;span&gt;? &lt;/span&gt;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마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수중 발레를 배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lt;span&gt;. &lt;/span&gt;영화 초반에는 수중 발레 동작을 따라하며 배울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뿐 이다&lt;span&gt;. &lt;/span&gt;실제로 수영장에 가서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이다&lt;span&gt;. &lt;/span&gt;영화 시작 장면을 살펴보자&lt;span&gt;. &lt;/span&gt;마리는 초등부 수중 발레 경기를 보면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lt;span&gt;, &lt;/span&gt;이윽고 경기장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중등부인 플로리안의 팀의 경기를 보고 이에 사로잡힌다&lt;span&gt;(&lt;/span&gt;이 순간은 마치 나가려는 마리를 사로잡으려는 듯이 아무 조짐도 없이&lt;span&gt;, &lt;/span&gt;조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마리는 처음부터 수중 발레에 관심이 없던 인물이다&lt;span&gt;. &lt;/span&gt;마리는 수중 발레가 아닌 수중 발레를 너무 잘하는 플로리안에 매혹된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것은 무슨 의미인가&lt;span&gt;? &lt;/span&gt;어설프고 미숙한 초등부 경기에 비해 플로리안과 중등부의 경기는 훨씬 성숙하다&lt;span&gt;. &lt;/span&gt;성숙&lt;span&gt;. &lt;/span&gt;마리는 이것에 매혹된 것이다&lt;span&gt;. &lt;/span&gt;영화 내내 마리는 성장과 성숙을 욕망하는 인물이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여러 중등부 팀원에서 플로리안에게 매혹된 것도 그녀가 가장 성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어떤 인물인가&lt;span&gt;? &lt;/span&gt;팀 내에서도 소문이 오갈 정도로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수영 코치의 성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lt;span&gt;. &lt;/span&gt;성적으로는 이미 어른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다&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성숙이란 인물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당위성이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플로리안을 바라보는 순간은 곧 그녀가 자신의 욕구와 그 욕구에 대한 당위성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이것은 동시에 성장의 순간이다&lt;span&gt;(&lt;/span&gt;마리가 초등부 경기를 본 후 중등부 경기를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lt;span&gt;). &lt;/span&gt;성숙은 성장을 전제로 한다&lt;span&gt;. &lt;/span&gt;이로서 마리는 자신의 욕구를 발견한 것이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성장을 욕구하기 시작한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마리가 그 욕구를 발현하고자 하는 인물인 것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이것은 마리의 친구인 안나 역시 마찬가지이다&lt;span&gt;. &lt;/span&gt;안나는 어떻게 욕구에 눈을 뜨는가&lt;span&gt;? &lt;/span&gt;경기가 끝난 후 팀원들이 모두 나간 후에야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프랑수아가 들어와 안나의 벗은 몸을 발견한다&lt;span&gt;. &lt;/span&gt;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서로를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같은 여자인 팀원들에게도 몸을 드러내기를 꺼리던 안나가 남자인 프랑수아에게 몸을 드러내는 순간&lt;span&gt;. &lt;/span&gt;이건 마리가 플로리안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lt;span&gt;. &lt;/span&gt;마리는 발견하고 안나는 발견된다&lt;span&gt;. &lt;/span&gt;마리는 플로리안을 선택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 많은 중등부 선수들 중 하필 플로리안에게 매혹된 것은 그녀가 가장 성숙하기 때문이고 마리는 이것을 알아본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안나는 선택하지 않고 선택된다&lt;span&gt;. &lt;/span&gt;그것도 프랑수아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발견된다&lt;span&gt;. &lt;/span&gt;안나는 타의적으로 욕망에 눈을 뜬다&lt;span&gt;. &lt;/span&gt;타자에 의한 욕망&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유아기적 욕망&lt;span&gt;. &lt;/span&gt;누군가가 나를 욕망하기를 바라는 욕망&lt;span&gt;. &lt;/span&gt;여기서부터 마리와 안나의 간극은 벌어지게 된다&lt;span&gt;. &lt;/span&gt;성장하는 마리와 성장하지 못하는 안나&lt;span&gt;. &lt;/span&gt;두 소녀는 모두 성적 욕구에 눈을 뜬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lt;span&gt;. &lt;/span&gt;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이때부터 예견된 일이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우리는 프랑수아라는 소년을 놓치면 안 된다&lt;span&gt;. &lt;/span&gt;영화 내내 프랑수아는 두 소녀의 성장을 막는 인물이다&lt;span&gt;. &lt;/span&gt;안나의 벗은 몸을 처음 보면서 유아기적 욕망을 심어주고 플로리안을 욕구하면서 플로리안이 마리로부터 멀어지도록 한다&lt;span&gt;. &lt;/span&gt;이때 마리는 어떻게 해서든 프랑수아의 자리를 지우고자 하고 안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는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프랑수아는 두 소녀의 간극이 더 벌어지도록 한다&lt;span&gt;. &lt;/span&gt;남성인 프랑수아가 여성인 마리와 안나를 갈라놓는 명확한 대비는 &lt;span&gt;&amp;lt;&lt;/span&gt;워터 릴리스&lt;span&gt;&amp;gt;&lt;/span&gt;가 가진 명확한 영화적 태도를 보여준다&lt;span&gt;. &amp;lt;&lt;/span&gt;워터 릴리스&lt;span&gt;&amp;gt;&lt;/span&gt;는 성장 영화이고 사춘기 소녀들의 이야기임에도 부모가 영화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부모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소녀들은 자유롭지만 부모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영화에서 소녀들에 대한 억압은 부모의 부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편재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마리와 안나가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이러한 억압과 대면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기에 마리가 처음 플로리안의 수영부에 들어갔을 때 마주하는 것은 경기 때 보았던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닌 물에 떠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 속의 몸부림이다&lt;span&gt;. &lt;/span&gt;그러한 모습을 처음 마리에게 보도록 해준 인물은 플로리안이다&lt;span&gt;(&amp;ldquo;&lt;/span&gt;물 속이 더 잘 보여&lt;span&gt;&amp;rdquo;). &lt;/span&gt;이건 일종의 교육이다&lt;span&gt;. &lt;/span&gt;성장에 대한 교육&lt;span&gt;. &lt;/span&gt;성장한 뒤 마주해야 하는 세계에 대한 교육&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lt;span&gt;? &lt;/span&gt;물 위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세계&lt;span&gt;. &lt;/span&gt;수영복 밖으로 털 하나 빠져나오지 않는 깔끔함을 유지해야 하는 세계&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대상화를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억압의 세계&lt;span&gt;. &lt;/span&gt;그래서인지 프랑수아를 비롯한 남자 수영부원들이 수영하는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들은 대상화 되지 않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대상화를 주도하는 인물들이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수중 발레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은 이러한 대상화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런 마리에게 플로리안이 교육하는 것은 대상화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주체성이다&lt;span&gt;. &lt;/span&gt;셀린 시아마는 대상화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본다&lt;span&gt;. &lt;/span&gt;그건 현실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 안에서 플로리안은 어떻게 주체성을 지키고 마리를 교육시키는가&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3. &lt;/span&gt;마리가 처음 수영장에 온 날 연습이 끝나고 플로리안이 마리를 데려가는 곳은 프랑수아와 만나는 장소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마리를 기다리게 한 후 프랑수아와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한참이 지나 다시 나타난 후에는 마리에게 집에 같이 가달라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lt;span&gt;. &lt;/span&gt;프랑수아와 성적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마리의 예상과 달리 플로리안은 프랑수아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그렇다고 그 모습을 마리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lt;span&gt;. &lt;/span&gt;혹은 마리의 존재가 플로리안이 프랑수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마리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여러 남자들과의 섹스를 거부해왔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이 남자들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에서 존재하기 위해서이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내가 한 번도 안 한 것 알게 되면 그냥 끝이야&lt;span&gt;&amp;rdquo;&lt;/span&gt;라는 말처럼&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일종의 성장통&lt;span&gt;. &lt;/span&gt;여성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대상화 되는 불합리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lt;span&gt;. &lt;/span&gt;마리를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성숙이 그 자체로 목적인 마리와 달리 플로리안에게 성숙은 살아가기 위한 삶의 기본조건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정작 실제로 남자들과 섹스를 하지는 않는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다른 방법으로 성숙한다&lt;span&gt;. &lt;/span&gt;남자들이 성적 욕구를 가지고 접근할 때 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때 섹스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남성이 아닌 플로리안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남성의 욕구를 따라가며 대상화 되지 않고 자신이 그 욕구를 소유한다&lt;span&gt;. &lt;/span&gt;욕구의 소유화&lt;span&gt;. &lt;/span&gt;이것이 플로리안의 성숙이고 성장 방식이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것이 플로리안이 마리에게 교육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셀린 시아마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하나의 실존 방식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다면 이것이 마리를 기다리게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 교육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따라가봐야 한다&lt;span&gt;. &lt;/span&gt;처음 마리가 한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날이 저물 때까지 플로리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리&lt;span&gt;. &lt;/span&gt;이때 마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lt;span&gt;. &lt;/span&gt;그리고 자신 앞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플로리안에 대한 분노&lt;span&gt;. &lt;/span&gt;마리는 그러한 플로리안이 돌아온 후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플로리안의 집주소를 지워버린다&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마리는 아직 플로리안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이 보여주는 것은 편재하는 억압&lt;span&gt;, &lt;/span&gt;수영장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대상화의 실체이다&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플로리안을 비롯한 여성들은 수영장에서뿐만이 아닌 어디에서나 가라앉기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 순간 나타나는 여성들의 무력감과 분노&lt;span&gt;, &lt;/span&gt;바로 플로리안이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마리에게는 이 역시 성장통이다&lt;span&gt;. &lt;/span&gt;이 성장통을 겪은 뒤 마리의 첫 번째 선택은 회피이다&lt;span&gt;. &lt;/span&gt;이 고통에 대한 회피&lt;span&gt;, &lt;/span&gt;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회피&lt;span&gt;. &lt;/span&gt;그래서 플로리안과 함께 대회를 따라간 그날 밤 마리는 안나를 다시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을 따라갈 때는 필연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안나와 다시 만나는 것은 결국 성장에 대한 거부이다&lt;span&gt;. &lt;/span&gt;처음에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던 안나도 마리를 집에 들인 후 서로의 얼굴에 물을 뿜으며 즐겁게 웃는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음 날 마리는 다시 한번 플로리안이 프랑수아를 만나기 위한 장소로 나간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번에는 마리가 교육을 거부한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마리&lt;span&gt;. &lt;/span&gt;마리가 떠나자 카메라는 이전에 마리를 잡은 것처럼 홀로 남겨져 방황하는 플로리안을 같은 구도에서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lt;span&gt;. &lt;/span&gt;이윽고 플로리안은 마리를 쫓아가 붙잡고 진실을 털어놓는다&lt;span&gt;. &lt;/span&gt;왜 갑자기 이를 말하는 것일까&lt;span&gt;? &lt;/span&gt;마리가 이 교육을 거부한다면&lt;span&gt;, &lt;/span&gt;이 교육은 실패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럼 어떻게 되는가&lt;span&gt;? &lt;/span&gt;이전에 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플로리안은 홀로 남게 된다&lt;span&gt;. &lt;/span&gt;물론 이미 플로리안은 이 세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마리가 지켜보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 사이의 간극은 크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홀로 플로리안을 기다릴 때 마리가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지만 마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플로리안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을 얻게 된다&lt;span&gt;. &lt;/span&gt;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힘&lt;span&gt;. &lt;/span&gt;여기서 플로리안의 두 번째 교육이 나타난다&lt;span&gt;. &lt;/span&gt;연대하는 힘&lt;span&gt;. &lt;/span&gt;이 두 번째 교육으로 넘어가기 위해 플로리안은 그제서야 진실을 말한다&lt;span&gt;. &lt;/span&gt;연대가 가능해질 때 비로서 두 소녀의 사랑도 가능해진다&lt;span&gt;. &lt;/span&gt;처음으로 마리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플로리안&lt;span&gt;. &lt;/span&gt;마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입히고 서로 웃어대는 두 소녀&lt;span&gt;. &lt;/span&gt;하지만 영화는 곧장 이 활기를 부정이라도 하듯이 정적에 싸인 채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들을 부감으로 찍는 쇼트로 넘어간다&lt;span&gt;. &lt;/span&gt;천장을 바라보는 소녀들&lt;span&gt;. &lt;/span&gt;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마리와 플로리안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성적 긴장감을 높인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또다시 영화는 재빠르게 넘어간다&lt;span&gt;. &lt;/span&gt;두 소녀가 성적으로 다가서는 순간은 천장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다&lt;span&gt;. &lt;/span&gt;도달하고 싶지만 도달 불가능한 세계&lt;span&gt;. &lt;/span&gt;억압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세계&lt;span&gt;. &lt;/span&gt;천장의 세계가 타나토스의 세계인 것은 제도 속의 자신의 부정하며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자신의 자아를 죽여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는 셀린 시아마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무수히 많은 억압이 편재하더라도 셀린 시아마는 삶을 찬양한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마리가 플로리안의 집을 떠난 이후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에 도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등장하는 이상한 장면&lt;span&gt;. &lt;/span&gt;수영장에서 마리는 프랑수아와 키스를 하는 플로리안을 보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마리&lt;span&gt;. &lt;/span&gt;그리고 다음 쇼트&lt;span&gt;. &lt;/span&gt;안나가 탈의실에서 나체로 몸을 드러내고 눈을 감은 채 서있다&lt;span&gt;. &lt;/span&gt;마치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lt;span&gt;. &lt;/span&gt;한 인물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회피하고 다른 인물은 간절히 누군가의 시선을 원한다&lt;span&gt;. &lt;/span&gt;물론 안나가 원하는 시선은 프랑수아의 시선이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안나가 프랑수아에게 몸을 드러낸 후 내내 프랑수아를 쫓아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lt;span&gt;. &lt;/span&gt;프랑수아는 안나의 욕망을 일깨운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lt;span&gt;. &lt;/span&gt;너가 나의 몸을 봤으니 책임지고 내 몸을 소유해라&lt;span&gt;. &lt;/span&gt;이 욕망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대상화시켜야 한다&lt;span&gt;. &lt;/span&gt;마리가 절대 가고자 하지 않는 길을 안나는 욕망한다&lt;span&gt;. &lt;/span&gt;셀린 시아마는 이 장면을 이상하게 이어 붙였다&lt;span&gt;. &lt;/span&gt;키스를 하는 플로리안과 프랑수아를 외면하기 위해 벽에 붙어 굳게 서있는 마리를 잡던 카메라는 매치 컷으로 자연스럽게 안나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담는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것이 연결의 순간이 아닌 균열의 순간임을 알아야만 한다&lt;span&gt;. &lt;/span&gt;마리와 안나는 이제 서로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다&lt;span&gt;. &lt;/span&gt;이를 알게 된 마리는 안나와 작별한다&lt;span&gt;. &lt;/span&gt;백화점에서 아이처럼 목걸이를 훔쳐 나오고 햄버거 가게에서도 장난감을 위해 어린이 세트를 주문하는 안나를 마리는 경멸스럽게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하는 말&lt;span&gt;. &amp;ldquo;&lt;/span&gt;왜 이렇게 애 같이 굴어&lt;span&gt;&amp;rdquo;. &lt;/span&gt;마리는 성장하지 못하는 안나를 이해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그러자 안나의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가슴도 없는 어린애는 너거든&lt;span&gt;&amp;rdquo;. &lt;/span&gt;안나에게 성장은 이런 것이다&lt;span&gt;. &lt;/span&gt;남자들에게 성적으로 더 잘 보이는 것&lt;span&gt;. &lt;/span&gt;성적으로 대상화 되는 것&lt;span&gt;. &lt;/span&gt;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의 성숙과 성장이다&lt;span&gt;. &lt;/span&gt;이런 안나에게 마리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대답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초등학교 때부터 나온 네 가슴&lt;span&gt;. &lt;/span&gt;그거 진짜 아냐&lt;span&gt;. &lt;/span&gt;그거 다 살이야&lt;span&gt;&amp;rdquo;. &lt;/span&gt;그리고 헤어지는 두 소녀&lt;span&gt;. &lt;/span&gt;이제 영화의 선택만이 남아있다&lt;span&gt;. &lt;/span&gt;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 두 소녀를 화해시킬지 혹은 영영 이별시킬지는 영화의 몫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4. &lt;/span&gt;마리가 안나와 작별하기 전 플로리안으로부터 세 번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lt;span&gt;. &lt;/span&gt;이번에는 마리가 직접 행동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자신과 섹스할 대상을 찾기 위해 성인들이 다니는 클럽으로 마리와 함께 간다&lt;span&gt;. &lt;/span&gt;클럽에서 함께 춤을 추는 마리와 플로리안&lt;span&gt;. &lt;/span&gt;두 소녀 사이에 다시금 성적 긴장감이 고조되며 키스를 하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개입하고 플로리안은 그 남성과 춤을 춘다&lt;span&gt;. &lt;/span&gt;마리 바로 앞에서&lt;span&gt;. &lt;/span&gt;눈물을 흘리는 마리를 두고 플로리안은 남성과 함께 나간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남성이 플로리안을 차로 데리고 가자 마리가 곧바로 달려와 플로리안을 데려간다&lt;span&gt;. &lt;/span&gt;남성에게서 빠져나온 플로리안은 화를 내기는커녕 마리와 함께 기뻐한다&lt;span&gt;. &lt;/span&gt;드디어 자신의 교육이 성공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마리는 플로리안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lt;span&gt;. &lt;/span&gt;그것이 플로리안이 바라던 힘이다&lt;span&gt;. &lt;/span&gt;그 자리에 있기를 거부하던 마리는 이제 확고하게 그 자리에 위치한다&lt;span&gt;. &lt;/span&gt;다음 날 아침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나는 네가 내 처음이면 좋겠어&lt;span&gt;&amp;rdquo;. &lt;/span&gt;교육이 성공했기에 마리는 이제 자신의 욕구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플로리안도 판단한다&lt;span&gt;. &lt;/span&gt;둘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한 쪽을 향한 성적 대상화는 있을 수 없고 순수한 사랑만이 남을 뿐이다&lt;span&gt;. &lt;/span&gt;처음에는 거절했던 마리도 이후 제안을 수락하고 둘은 첫 경험을 하게 된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지만 둘 만의 시간을 오래 가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얼마 있지 않아 프랑수아가 플로리안의 집으로 찾아온다&lt;span&gt;. &lt;/span&gt;마리는 또다시 집 밖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일까&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프랑수아는 플로리안과 헤어진 후 안나를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이유는 하나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과의 섹스를 실패해서이다&lt;span&gt;. &lt;/span&gt;안나는 언제나 프랑수아의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lt;span&gt;(&lt;/span&gt;안나가 선물한 목걸이조차 프랑수아는 플로리안에게 선물한다&lt;span&gt;). &lt;/span&gt;프랑수아가 바라는 것은 오직 섹스이고 안나 역시 마찬가지이다&lt;span&gt;. &lt;/span&gt;드디어 프랑수아와 섹스를 하는 것에 성공한 안나&lt;span&gt;. &lt;/span&gt;그리고 다음 날 마리와 안나는 재회한다&lt;span&gt;. &lt;/span&gt;마리는 대화를 통해 프랑수아가 플로리안과 섹스하지 않고 안나와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섹스를 했지만 첫 키스를 하지 않은 안나의 첫 키스 상대가 되어준다&lt;span&gt;. &lt;/span&gt;이로서 둘은 화해한다&lt;span&gt;. &lt;/span&gt;그럼 이때 변하는 쪽은 누구인가&lt;span&gt;? &lt;/span&gt;아마도 마지막 장면이 해답이 되어줄 것이다&lt;span&gt;. &lt;/span&gt;마리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안나는 프랑수아와 재회한다&lt;span&gt;. &lt;/span&gt;프랑수아는 곧 안나와 다시 섹스를 하려하지만 안나는 그에게 침을 뱉고 떠난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안나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섹스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녀는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대체자로서 성적 대상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실존하는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며 그런 자기 자신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lt;span&gt;(&lt;/span&gt;반복하자면 프랑수아는 플로리안과의 섹스 실패를 대체하기 위해 안나를 찾아갔던 것이다&lt;span&gt;). &lt;/span&gt;안나는 자신의 성장을 포기한다&lt;span&gt;. &lt;/span&gt;그 대신 마리가 바라던 성장을 선택한다&lt;span&gt;. &lt;/span&gt;파티장을 떠나려는 안나&lt;span&gt;. &lt;/span&gt;하지만 마리는 플로리안을 기다린다&lt;span&gt;. &lt;/span&gt;그런 마리가 보는 것은 또다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플로리안이다&lt;span&gt;. &lt;/span&gt;탈의실에서 화가 난 채 플로리안에게 따지는 마리&lt;span&gt;. &lt;/span&gt;그러자 플로리안을 마리를 부르고 둘은 첫 키스를 나눈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의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이제 알겠지&lt;span&gt;?&amp;rdquo; &lt;/span&gt;플로리안은 변한 적이 없다&lt;span&gt;. &lt;/span&gt;둘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나 이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lt;span&gt;. &lt;/span&gt;다시 말하자면 그건 천장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플로리안은 자신이 이 세계 내에 속한 인물임을 알고 있고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다만 그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를 원한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마리가 할 일은 단 하나이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플로리안의 마지막 교육&lt;span&gt;. &amp;ldquo;&lt;/span&gt;만약 쟤 별로면 그때처럼 구하러 와줘&lt;span&gt;&amp;rdquo;.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플로리안의 진심을 알게 된 마리는 갑자기 수영장으로 향한다&lt;span&gt;. &lt;/span&gt;그러고는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안나가 따라와 그녀 역시 물 속으로 뛰어든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들 사이에는 파티에서 홀로 춤을 추는 플로리안의 모습이 교차된다&lt;span&gt;. &lt;/span&gt;누군가와 함께 춤을 춰야만 했던 플로리안은 이제 홀로 춤을 출 수 있다&lt;span&gt;. &lt;/span&gt;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가 되었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lt;span&gt;. &lt;/span&gt;위험에 처하면 마리가 구하러 올 것이다&lt;span&gt;. &lt;/span&gt;어쩌면 이 춤은 자신의 교육이 성공한 것에 대한 자축의 춤처럼 보이기도 한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물 위에 누운 채로 떠있는 마리와 안나의 모습을 부감으로 찍은 쇼트이다&lt;span&gt;. &lt;/span&gt;두 소녀는 더 이상 떠있기 위해 헤엄칠 필요가 없다&lt;span&gt;. &lt;/span&gt;필사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상화에 부합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두 소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물 위에 떠있다&lt;span&gt;. &lt;/span&gt;마리와 안나는 함께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더 이상 천장을 지배하는 죽음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두 소녀&lt;span&gt;(&lt;/span&gt;혹은 세 소녀&lt;span&gt;)&lt;/span&gt;는 오로지 삶의 활력과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원제인 &lt;span&gt;&lt;/span&gt;에서 문어&lt;span&gt;(pieuvres)&lt;/span&gt;나 영어 제목인 &lt;span&gt;, &lt;/span&gt;즉 수련이 의미하는 것이 마지막 쇼트에서 마리와 안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목의 문어나 수련이 모두 복수형이라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영화 속의 문어 혹은 수련은 하나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마리와 안나가 그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lt;span&gt;? &lt;/span&gt;물론 마리와 플로리안&lt;span&gt;. &lt;/span&gt;이 인물들은 다른 공간에 있어도 서로 함께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간다&lt;span&gt;. &lt;/span&gt;셀린 시아마의 다른 인물들 역시 그렇다&lt;span&gt;. &lt;/span&gt;아마 로레가 다시 혼자가 되는 순간에&lt;span&gt;, &lt;/span&gt;마리엠이 울고 있는 그 순간에&lt;span&gt;, &lt;/span&gt;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순간에 셀린 시아마의 소녀들이 나타나줄 것이다&lt;span&gt;. &lt;/span&gt;다행히도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lt;span&gt;.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category>리뷰</category>
      <category>셀린시아마</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워터릴리스</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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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21 17:33:1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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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리뷰</title>
      <link>https://filmandday.tistory.com/40</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filename=&quot;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c09bL1/btqRVpO1tMl/MWioUKfoBwItriCpH40eb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c09bL1/btqRVpO1tMl/MWioUKfoBwItriCpH40eb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c09bL1/btqRVpO1tMl/MWioUKfoBwItriCpH40eb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09bL1%2FbtqRVpO1tMl%2FMWioUKfoBwItriCpH40ebk%2Fimg.jpg&quot; data-filename=&quot;img.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0. &lt;/span&gt;처음 영화가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lt;span&gt;. &lt;/span&gt;이 영화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lt;span&gt;. &lt;/span&gt;그것도 극장이 아닌 모니터를 통해서&lt;span&gt;. &lt;/span&gt;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를 찍은 커스틴 존슨이 나에게는 어떤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녀의 전작 &lt;span&gt;&amp;lt;&lt;/span&gt;카메라를 든 사람&lt;span&gt;&amp;gt;&lt;/span&gt;을 본 것은 한 영화제에서이다&lt;span&gt;. &lt;/span&gt;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견해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lt;span&gt;. &amp;lt;&lt;/span&gt;카메라를 든 사람&lt;span&gt;&amp;gt;&lt;/span&gt;은 분명 걸작이고 나에게 있어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lt;span&gt;. &lt;/span&gt;게다가 그 영화는 현재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다&lt;span&gt;. &lt;/span&gt;오직 그때 아니면 볼 수 없었던 영화&lt;span&gt;. &lt;/span&gt;그래서인지 &lt;span&gt;&amp;lt;&lt;/span&gt;카메라를 든 사람&lt;span&gt;&amp;gt;&lt;/span&gt;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lt;span&gt;. &lt;/span&gt;그녀의 다음 작품&lt;span&gt; &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가 선댄스 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것이 한국에서 금방 개봉할 것이라는 큰 기대감은 없는 상태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였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어느 순간 그 영화가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다&lt;span&gt;. &lt;/span&gt;극장이 아니라 집 안으로&lt;span&gt;. &lt;/span&gt;무언가 기쁜 동시에 당황스러운 감정&lt;span&gt;. &lt;/span&gt;물론 여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넷플릭스와 같은 &lt;span&gt;OTT &lt;/span&gt;플랫폼과 극장의 차이 혹은 스트리밍 공개와 극장 상영&lt;span&gt;, &lt;/span&gt;그리고 영화제 관람에 따른 영화적 체험의 차이에 대한 긴 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나 여기서는 일단 보류 해두자&lt;span&gt;. &lt;/span&gt;다만 단편적인 인상만을 말하자면 무언가 넷플릭스가 어떠한 간극을 없애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lt;span&gt;. &lt;/span&gt;어떤 간극&lt;span&gt;? &lt;/span&gt;물론 영화제 상영 영화와 나 사이의 간극&lt;span&gt;. &lt;/span&gt;아마도 영화제&lt;span&gt;, &lt;/span&gt;혹은 영화제에서만 관람 가능한 영화들에 대한 낭만적 동경은 나뿐만이 아닌 다른 시네필들 역시 지니고 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오직 그때만 볼 수 있는 영화들&lt;span&gt;. &lt;/span&gt;그런 영화들을 상영해주는 영화제라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lt;span&gt;. &lt;/span&gt;거기에 대한 어떤 낭만&lt;span&gt;. &lt;/span&gt;그리고 그 영화들이 극장에 정식 상영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까지&lt;span&gt;. &lt;/span&gt;그것을 넷플릭스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lt;span&gt;. &lt;/span&gt;물론 이런 감정이 처음은 아니다&lt;span&gt;. &lt;/span&gt;이를 테면 마티 디옵의 &lt;span&gt;&amp;lt;&lt;/span&gt;애틀란틱스&lt;span&gt;&amp;gt;&lt;/span&gt;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lt;span&gt;. &lt;/span&gt;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일지 아닐지&lt;span&gt;, &lt;/span&gt;앞으로의 영화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lt;span&gt;. &lt;/span&gt;서론이 너무 길어졌다&lt;span&gt;. &lt;/span&gt;영화로 돌아가기로 하자&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1. &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는 장르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lt;span&gt;. &lt;/span&gt;당연한 사실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무언가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다&lt;span&gt;. &lt;/span&gt;알다시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커스틴 존슨이 직접 제작한 픽션들이 논픽션 사이 사이 개입한다&lt;span&gt;. &lt;/span&gt;이건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다&lt;span&gt;. &lt;/span&gt;극영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이미 많이 봐온 사례가 있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lt;span&gt;&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에서 픽션은 어딘가 이상하다&lt;span&gt;. &lt;/span&gt;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픽션이 개입하는 경우는 보통 현재는 찍을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목적이다&lt;span&gt;. &lt;/span&gt;바꿔 말하면 논픽션으로 이어나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을 픽션으로 보충하는 셈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lt;span&gt;&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의 픽션은 서사적인 부분에서는 분명히 불필요한 장면들이다&lt;span&gt;. &lt;/span&gt;종종 픽션은 논픽션의 전개에 갑작스럽게 개입하여 진행을 막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도 보인다&lt;span&gt;. &lt;/span&gt;게다가 영화는 픽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장면의 전후로 하여 고스란히 드러낸다&lt;span&gt;. &lt;/span&gt;의도적으로 픽션은 논픽션과 구분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여기서 픽션은 논픽션의 보충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메이킹 필름으로 봐야할까&lt;span&gt;? &lt;/span&gt;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픽션을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찍은 논픽션으로 볼 수도 있을까&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에는 비약이 많다&lt;span&gt;. &lt;/span&gt;만약 정말 그렇다면 마지막에 완성된 픽션이 나타나야 하는데 영화 내내&lt;span&gt;, &lt;/span&gt;혹은 영화 밖에서도 그런 완성된 픽션은 없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마지막에 모든 픽션들은 논픽션에 환원되는 것처럼도 보인다&lt;span&gt;. &lt;/span&gt;이 픽션들은 오로지 다큐멘터리 안에서만 부분적으로 활용되고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lt;span&gt;&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는 논픽션에 사용되기 위한 픽션을 찍는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이다&lt;span&gt;. &lt;/span&gt;무언가 이상해 보이는 방식&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lt;span&gt;? &lt;/span&gt;여기서 우리는 영화 속 픽션들이 아버지 딕 존슨의 죽음을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아버지가 몸이 쇠약해지고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커스틴 존슨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이별을 맞이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자각한다&lt;span&gt;. &lt;/span&gt;두려운 순간&lt;span&gt;. &lt;/span&gt;하지만 오게 될 순간&lt;span&gt;. &lt;/span&gt;이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순간&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영화를 찍기로 한다&lt;span&gt;. &lt;/span&gt;어떤 영화&lt;span&gt;? &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라는 다큐멘터리&lt;span&gt;. &lt;/span&gt;그리고 다큐멘터리를 위한 픽션&lt;span&gt;. &lt;/span&gt;이 픽션들은 모두 딕 존슨의 죽음을 상상하며 만들어진다&lt;span&gt;. &lt;/span&gt;위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컴퓨터에 머리를 맞거나&lt;span&gt;, &lt;/span&gt;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lt;span&gt;, &lt;/span&gt;공사현장 목재에 박힌 못에 목을 찔려서 피를 흘리며 죽기도 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딕 존슨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사후세계에서의 모습도 찍는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실제 현실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딕 존슨의 모습을 보게 된다&lt;span&gt;. &lt;/span&gt;둘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분리되는 것은 사건과 실존이다&lt;span&gt;. &lt;/span&gt;죽음이라는 픽션&lt;span&gt;. &lt;/span&gt;죽음이라는 사건&lt;span&gt;. &lt;/span&gt;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실존&lt;span&gt;. &lt;/span&gt;영화 속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은 순간 영화는 재빨리 이를 픽션으로 만든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아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딕 존슨을 모습을 보여주며 논픽션으로 넘어간다&lt;span&gt;. &amp;lt;&lt;/span&gt;딕 존슨이 죽었습니다&lt;span&gt;&amp;gt;&lt;/span&gt;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웃음과 유희를 잃지 않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lt;span&gt;. &lt;/span&gt;죽음이라는 농담&lt;span&gt;. &lt;/span&gt;사건으로서의 유희&lt;span&gt;. &lt;/span&gt;아직 사건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실존은 사건을 상상할 수 있고 사건은 실존을 침범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이 이 영화를 찍은 것은 다가올 아버지의 죽음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는 아버지의 실존을 찍기 위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유희가 영화 내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불안감은 표면에서 드러난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2. &lt;/span&gt;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 중 하나는 딕 존슨이 실제로 가장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은 픽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영화 초반부에 &lt;span&gt;&amp;ldquo;&lt;/span&gt;딕 존슨은 심장마비가 오기 전날 더블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었다&lt;span&gt;&amp;rdquo;&lt;/span&gt;라는 문구가 적힌 노트를 보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의 심장마비가 실제로 그 초콜릿 케이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때부터 영화에서 초콜릿 케이크나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보게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또 다시 같은 사건이 나타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lt;span&gt;. &lt;/span&gt;게다가 그 사건은 픽션이 아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lt;span&gt;(&lt;/span&gt;계단에서 넘어져 죽는 픽션도 실제 사건에서 가져왔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엉덩이만 부러졌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커스틴 존슨은 이 사건을 픽션화하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영화 속에서 딕 존슨은 본인을 죽게 할 수도 있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즐겨 먹는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도 이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흔쾌히 권하기까지 한다&lt;span&gt;. &lt;/span&gt;불길한 음식&lt;span&gt;. &lt;/span&gt;그렇지만 멀리 하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한 음식&lt;span&gt;. &lt;/span&gt;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음에도 딸은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건 남아있는 아버지의 시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커스틴 존슨의 결단인 것만 같다&lt;span&gt;. &lt;/span&gt;죽음은 결국 도래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그때까지 남아있는 생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본인의 몫이다&lt;span&gt;. &lt;/span&gt;여기에서도 실존은 영화와 분리된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죽음에 점차 다가서는 실존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본다&lt;span&gt;. &lt;/span&gt;딕 존슨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건을 픽션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그러한 결단이다&lt;span&gt;. &lt;/span&gt;실제로 일어났던 그 사건을 픽션으로 만든다면 사건은 연장되고 픽션은 픽션으로만 남아있지 않으면서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건 실존에 대한 사건의 침범으로 이어진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이 가장 경계하는 상황&lt;span&gt;. &lt;/span&gt;실존이 사건에 무너지는 순간&lt;span&gt;. &lt;/span&gt;영화는 이 불안감을 부정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실존을 긍정한다&lt;span&gt;. &lt;/span&gt;실존의 긍정만이 죽음을 유희로 만들 수 있다&lt;span&gt;. &lt;/span&gt;딕 존슨이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도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아직 죽음은 오지 않았기에 남아있는 생을 즐기고자 하는 의지&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도 이 의지를 함께 긍정한다&lt;span&gt;. &lt;/span&gt;아버지&lt;span&gt;, &lt;/span&gt;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lt;span&gt;. &lt;/span&gt;그러니 마음껏 케이크를 드셔도 돼요&lt;span&gt;. &lt;/span&gt;이때 커스틴 존슨과 딕 존슨은 케이크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지우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아버지를 죽게 할 수도 있었던 케이크&lt;span&gt;. &lt;/span&gt;그 케이크에 더 이상 죽음은 없고 오로지 달콤함만이 남아있다&lt;span&gt;. &lt;/span&gt;일종의 유희&lt;span&gt;. &lt;/span&gt;삶과 죽음의 분리&lt;span&gt;. &lt;/span&gt;영화 내내 커스틴 존슨이 하는 일은 삶과 실존은 죽음과 사건의 이미지 속에서 구해내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그녀에게 자리잡은 강렬한 불안함이 돌출되는 순간이 종종 나타난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초반에는 완전히 유희에서 시작한다&lt;span&gt;. &lt;/span&gt;딕 존슨이 죽었을 때의 장례식을 촬영하는 장면이나 스턴트 맨에게 조언을 받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앞으로 나타날 죽음이 전부 허구라는 것을 선언한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불안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커스틴 존슨 가족이 뉴욕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이다&lt;span&gt;. &lt;/span&gt;이사를 가면서 딕 존슨은 은퇴하고 자신이 아끼던 차를 팔 수밖에 없었고 정 들었던 공간마저 떠나게 된다&lt;span&gt;. &lt;/span&gt;아버지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차를 팔아버린 딸에게 서운한 것 같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아버지에게 복잡한 뉴욕 시내에서 운전하게 두기는 딸로서 어려웠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건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의 삶에 개입하는 첫 번째 순간이다&lt;span&gt;. &lt;/span&gt;그녀가 개입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실존을 유지할 수 없다&lt;span&gt;. &lt;/span&gt;필연적인 선택&lt;span&gt;. &lt;/span&gt;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선택&lt;span&gt;. &lt;/span&gt;여기서부터 죽음은 단순한 픽션을 위한 사건이 아닌 실제 현실과 실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lt;span&gt;. &lt;/span&gt;집을 떠나기 전 커스틴 존슨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찍어 놓은 영상을 본다&lt;span&gt;. &lt;/span&gt;이후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잠겨 카메라를 내려놓고 울기까지 한다&lt;span&gt;. &lt;/span&gt;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lt;span&gt;. &amp;ldquo;&lt;/span&gt;근데 우린 비슷한 일을 또 겪고 있잖아&lt;span&gt;&amp;rdquo;. &lt;/span&gt;그리고 딸의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무서워요&lt;span&gt;&amp;rdquo;. &lt;/span&gt;어머니가 죽음이라는 사건 안으로 들어갔듯이 아버지 역시 그 사건을 맞이할 것이다&lt;span&gt;. &lt;/span&gt;아무리 인물을 사건에서 구출하고자 해도 사건은 도래한다&lt;span&gt;. &lt;/span&gt;이 불안함&lt;span&gt;. &lt;/span&gt;이 무기력함&lt;span&gt;. &lt;/span&gt;아버지는 딸에게 이 장면도 영화에 넣으라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고민하던 커스틴 존슨은 그 장면을 영화에 넣었다&lt;span&gt;. &lt;/span&gt;아버지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만 딸은 이를 잊어버리기 위해서인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천국에 간 딕 존슨을 보여주며 다시 죽음을 유희 안에 가둔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3. &lt;/span&gt;뉴욕으로 이사오면서 커스틴 존슨의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lt;span&gt;. &lt;/span&gt;기억력 검사를 위해 병원에 찾아갔을 때 딕 존슨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진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커스틴 존슨의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좁은 방에서 휴대폰으로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이전에도 내레이션은 있었지만 녹음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오는 것은 이때가 최초이다&lt;span&gt;. &lt;/span&gt;아무래도 커스틴 존슨은 이때부터 내레이션이 특정한 힘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lt;span&gt;. &lt;/span&gt;어떤 힘&lt;span&gt;? &lt;/span&gt;영화 바깥에서 개입하는 듯한 주술적인 힘&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영화 바깥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자신을 영화의 창작자 이전에 현실의 삶에 종속된 인간으로서 보기를 원한다&lt;span&gt;. &lt;/span&gt;그건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이기에 가능한 결단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픽션이 아닌 논픽션&lt;span&gt;. &lt;/span&gt;허구가 아닌 실재를 찍기 위한 장르&lt;span&gt;. &lt;/span&gt;감독이 아무리 영화 안에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고 해도 현실은 온전히 존재한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의 이 선택은 또 한번의 분리를 만들어낸다&lt;span&gt;. &lt;/span&gt;어떤 분리&lt;span&gt;. &lt;/span&gt;영화와 현실의 분리&lt;span&gt;. &lt;/span&gt;영화라는 픽션&lt;span&gt;. &lt;/span&gt;현실이라는 논픽션&lt;span&gt;. &lt;/span&gt;이건 꽤나 무서운 선택이다&lt;span&gt;. &lt;/span&gt;어째서&lt;span&gt;? &lt;/span&gt;자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픽션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시도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lt;span&gt;. &lt;/span&gt;아버지의 실존을 지키려는 노력&lt;span&gt;. &lt;/span&gt;죽음을 픽션으로 만들면서 아버지의 실존을 긍정하려는 시도&lt;span&gt;. &lt;/span&gt;그 모든 것이 픽션에 불과하다면 결국 죽음은 현실에서 도래할 것이고 자신의 영화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lt;span&gt;. &lt;/span&gt;영화라는 사건&lt;span&gt;. &lt;/span&gt;현실이라는 실존&lt;span&gt;. &lt;/span&gt;이 사건은 실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종속될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때문에 이후 딕 존슨의 죽음을 찍는 장면은 이전과는 다르게 완성된 픽션의 형태가 아닌 촬영하는 현장을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촬영 후 결과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연출된 느낌은 아니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이 허무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lt;span&gt;. &lt;/span&gt;어떻게 극복할 것인가&lt;span&gt;? &lt;/span&gt;영화는 캘리포니아의 로마린다로 건너간다&lt;span&gt;. &lt;/span&gt;그곳에서 딕 존슨은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인 롤리타를 만난다&lt;span&gt;. &lt;/span&gt;롤리타는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을 떠나 보내면서 홀로 지내고 있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왜 그녀를 찾아간 것일까&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그녀에게 단 한 가지의 질문을 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병리학자랑 오래 살다 보니 죽음에 관한 생각이 바뀌셨나요&lt;span&gt;?&amp;rdquo; &lt;/span&gt;잠시 고민하던 롤리타는 그저 &lt;span&gt;&amp;ldquo;&lt;/span&gt;죽음은 피할 수 없어&lt;span&gt;. &lt;/span&gt;우리의 일부이지&lt;span&gt;&amp;rdquo;&lt;/span&gt;라는 꽤나 상투적인 답변을 할 뿐이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우리는 이 답변의 상투성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lt;span&gt;. &lt;/span&gt;그 대답이 상투적인 것은 죽음이 삶의 필연적인 요소라는 것을 부각한다&lt;span&gt;. &lt;/span&gt;그 외에 다른 답변은 불가능하다&lt;span&gt;. &lt;/span&gt;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이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이것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한 초상에 불과한 것일까&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전에 느껴지던 불안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이때의 롤리타와 딕 존슨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 대신 삶의 충만함이 느껴진다&lt;span&gt;. &lt;/span&gt;이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lt;span&gt;? &lt;/span&gt;롤리타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lt;span&gt;. &lt;/span&gt;그렇기에 죽음 이후에 대해서 자세하게 걱정하지는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하는 말&lt;span&gt;. &amp;ldquo;&lt;/span&gt;성경에선 다들 부활한다고 하잖아&lt;span&gt;. &lt;/span&gt;난 그거면 충분해&lt;span&gt;&amp;rdquo;. &lt;/span&gt;이때 롤리타는 자신의 죽음을 농담으로 만들어낸다&lt;span&gt;. &lt;/span&gt;죽음에 대한 유희&lt;span&gt;. &lt;/span&gt;물론 이건 영화가 가진 태도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이 영화에서 픽션의 창조를 통해 죽음을 사건화하는 동시에 실존을 긍정하면서 죽음을 실존과 분리시킨다면 롤리타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 안에 내재화 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그녀가 죽음을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실존 역시 긍정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커스틴 존슨이 죽음이 지금 여기 없기에 유희할 수 있다면 롤리타는 그것이 지금 여기 있기에 유희할 수 있다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다른 방법&lt;span&gt;. &lt;/span&gt;그러나 같은 태도&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이 롤리타에게서 얻은 것은 일종의 가르침이자 위안이다&lt;span&gt;. &lt;/span&gt;또 다른 방법으로도 현재 자신의 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가르침&lt;span&gt;. &lt;/span&gt;현실에서도 자신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위안&lt;span&gt;. &lt;/span&gt;그러니 이 영화는 무의미하지 않다&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계속 영화를 찍어 나간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4. 1&lt;/span&gt;년이 지난 후 딕 존슨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다&lt;span&gt;. &lt;/span&gt;자기가 사는 집을 지나치기도 하고 은퇴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집을 사무실로 착각하기도 한다&lt;span&gt;. &lt;/span&gt;이제 죽음은 외면하기 어려운 수준을 다가왔다&lt;span&gt;. &lt;/span&gt;물론 여전히 커스틴 존슨은 죽음에 대한 유희를 잃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이전에 느껴지던 삶에 대한 충만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lt;span&gt;. &lt;/span&gt;예컨대 한 가지 장면&lt;span&gt;. &lt;/span&gt;딕 존슨이 길을 걸어가던 중 공사현장의 인부가 휘두른 목재에 박힌 못에 목을 찔려 피를 흘리며 죽는 픽션&lt;span&gt;. &lt;/span&gt;분명 우리는 이것이 허구이고 유희라는 점을 알고 있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그 장면을 촬영하는 현장을 보여준 후 커스틴 존슨은 내레이션으로 죽은 자신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사랑이 아름다운 것만 준다면 참 쉬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사랑하면 서로를 잃는 고통도 마주해야 한다&lt;span&gt;&amp;rdquo;. &lt;/span&gt;무언가 불길한 말&lt;span&gt;. &lt;/span&gt;이 말이 단순하게 엄마에 대한 말이 아닌 아버지에 대한 말이기도 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윽고 나타나는 천국에서 딕 존슨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다&lt;span&gt;. &lt;/span&gt;천국에서의 분위기는 즐겁지만 어딘가 불안하다&lt;span&gt;. &lt;/span&gt;이전까지 천국에서는 딕 존슨 홀로 있었다&lt;span&gt;(&lt;/span&gt;천국에서 딕 존슨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를 보는 게 맞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이번에는 실제 인물인 딕 존슨의 아내가 천국에 함께 있다&lt;span&gt;. &lt;/span&gt;픽션에 논픽션이 개입하는 순간&lt;span&gt;. &lt;/span&gt;사건으로서의 죽음과 실제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lt;span&gt;. &lt;/span&gt;더 이상은 픽션은 허구로만 존재할 수 없다&lt;span&gt;. &lt;/span&gt;죽음은 일상에 스며들고 불안은 외면하기 어려운 감정이 되었다&lt;span&gt;. &lt;/span&gt;이 모든 게 &lt;span&gt;1&lt;/span&gt;년 사이 변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 장면 이전에 의자에 앉아 잠을 자던 딕 존슨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다&lt;span&gt;. &lt;/span&gt;픽션 촬영을 마친 딕 존슨은 무언가 불편한 듯이 말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심장마비보다 더 끔찍하군&lt;span&gt;. &lt;/span&gt;더 불쾌하고 괴롭지&lt;span&gt;&amp;rdquo;. &lt;/span&gt;결국 커스틴 존슨은 촬영을 중단한다&lt;span&gt;. &lt;/span&gt;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유희로만 남을 수 없다&lt;span&gt;. &lt;/span&gt;일상이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픽션 역시 유희에서 멀어진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삶의 충만함이 가득하던 픽션은 점차 어두워진다&lt;span&gt;. &lt;/span&gt;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픽션은 짧은 무성영화이다&lt;span&gt;. &lt;/span&gt;할로윈을 맞아 복장을 갖추고 거리에서 사탕을 구하러 다니던 중 커스틴 존슨은 피곤해 하는 딕 존슨을 집에 잠시 두고 나온다&lt;span&gt;. &lt;/span&gt;그 사이 집에 있던 딕 존슨은 상황을 잠시 잊어버렸던 모양이다&lt;span&gt;. &lt;/span&gt;낯선 장소에 머물러 있었던 딕 존슨은 자신이 겪었던 불안감을 딸에게 토로한다&lt;span&gt;. &lt;/span&gt;이야기를 전해 들은 커스틴 존슨은 그 당시 아버지가 겪었을 감정을 생각하며 픽션을 만든다&lt;span&gt;. &lt;/span&gt;이제 픽션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픽션 안의 사건은 인물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오히려 픽션 안에서도 인물의 실존이 담겨있다&lt;span&gt;. &lt;/span&gt;이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딸도 더 이상 불길하게만 느껴지던 예감을 받아들인다&lt;span&gt;. &amp;ldquo;&lt;/span&gt;아빠를 데려가려 그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분명한 걸 깨달았고 우린 그게 뭔지 알았다&lt;span&gt;. &lt;/span&gt;그건 엄마와도 겪었던 일이다&lt;span&gt;. &lt;/span&gt;난 어딘가로 아빠를 보내야 한다&lt;span&gt;. &lt;/span&gt;언젠가&lt;span&gt;, &lt;/span&gt;어떻게든 말이다&lt;span&gt;&amp;rdquo;. &lt;/span&gt;커스틴 존슨도 분명하게 깨달았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이어지는 말&lt;span&gt;. &amp;ldquo;&lt;/span&gt;하지만 내가 예전에 이해 못 했던 것이자 안식교에서 인정하는 가장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은 바로 남겨지는 것이다&lt;span&gt;&amp;rdquo;. &lt;/span&gt;남겨지는 두려움&lt;span&gt;. &lt;/span&gt;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lt;span&gt;. &lt;/span&gt;이제 그녀가 극복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이 겪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lt;span&gt;. &lt;/span&gt;이것까지 모두 받아들일 때 비로서 죽음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5. &lt;/span&gt;영화의 후반부&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은 아버지의 생일 날 이스라엘로 출장을 나가야 한다&lt;span&gt;. &lt;/span&gt;떠나기 전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가 좋아하는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만들어준다&lt;span&gt;. &lt;/span&gt;아버지가 너무 좋아하는&lt;span&gt;, &lt;/span&gt;그러나 아버지를 떠나 보낼 수도 있었던 케이크&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미 커스틴 존슨이 케이크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lt;span&gt;. &lt;/span&gt;죽음에 대한 커스틴 존슨의 태도는 물론 딕 존슨의 상태 또한 그 사이 많이 바뀌었다&lt;span&gt;. &lt;/span&gt;케이크에는 달콤함만이 아닌 죽음에 대한 기운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lt;span&gt;. &lt;/span&gt;여전히 딕 존슨은 케이크를 좋아하고 즐겨 먹는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다음 장면&lt;span&gt;. &lt;/span&gt;구급차에 &lt;span&gt;86&lt;/span&gt;세 남성이 심정지로 인해 실려있다&lt;span&gt;. &lt;/span&gt;의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고 커스틴 존슨은 이걸 찍고 있다&lt;span&gt;. &lt;/span&gt;픽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장면&lt;span&gt;. &lt;/span&gt;정말 딕 존슨이 죽은 것일까&lt;span&gt;? &lt;/span&gt;이어지는 딕 존슨의 장례식&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는 픽션이다&lt;span&gt;. &lt;/span&gt;딕 존슨은 자신의 장례식을 문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lt;span&gt;. &lt;/span&gt;한 쪽에서는 픽션이 진행되고 다른 쪽에서는 논픽션이 진행된다&lt;span&gt;. &lt;/span&gt;공존하는 두 서사&lt;span&gt;. &lt;/span&gt;이전까지 두 서사를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커스틴 존슨은 이제 둘을 공존하게 만든다&lt;span&gt;. &lt;/span&gt;장례식의 사회를 맡은 레이가 물러나고 오르간이 연주되는 순간 단상 위에 놓여있는 딕 존슨의 관은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이제 딕 존슨이 들어갈 차례이다&lt;span&gt;. &lt;/span&gt;다가오는 딕 존슨에게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lt;span&gt;. &lt;/span&gt;카메라는 장례식장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딕 존슨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롱테이크로 담아낸다&lt;span&gt;. &lt;/span&gt;이 순간&lt;span&gt;, &lt;/span&gt;바로 이 순간&lt;span&gt;, &lt;/span&gt;논픽션이 픽션을 만나고 실존이 죽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lt;span&gt;. &lt;/span&gt;둘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실존은 죽음 안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실존은 죽음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죽음을 수용하고 내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lt;span&gt;. &lt;/span&gt;장례식장의 사람들이 딕 존슨에게 보내는 박수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한 딕 존슨이 아닌 죽음 이후에도 우리 곁은 떠나지 않는 그의 형형한 실존을 향한 박수이다&lt;span&gt;. &lt;/span&gt;이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유희이며 커스틴 존슨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다&lt;span&gt;. &lt;/span&gt;남겨지는 것의 두려움&lt;span&gt;. &lt;/span&gt;아버지가 떠나간 후의 두려움&lt;span&gt;. &lt;/span&gt;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실존은 여전히 남아있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더 이상 죽음을 실존과 대립시킬 필요 없다&lt;span&gt;. &lt;/span&gt;아버지의 실존을 지키려던 딸의 노력은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결실을 맺었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에는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감흥이 존재한다&lt;span&gt;. &lt;/span&gt;여기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lt;span&gt;. &lt;/span&gt;다만 나에게 있어 이 영화적 순간은&lt;span&gt;, &lt;/span&gt;커스틴 존슨의 이 선택은&lt;span&gt;, &lt;/span&gt;다큐멘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다&lt;span&gt;. &lt;/span&gt;물론 커스틴 존슨은 이미 &lt;span&gt;&amp;lt;&lt;/span&gt;카메라를 든 사람&lt;span&gt;&amp;gt;&lt;/span&gt;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영화적 이미지로 남았던 피사체들을 한 프레임 안으로 모으면서 인물들을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닌 능동적 주체이자 형형한 실존으로 보이도록 만든 순간을 선사했다&lt;span&gt;. &lt;/span&gt;아마 커스틴 존슨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이러한 프레임 안의 피사체를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생생한 실존으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lt;span&gt;. &lt;/span&gt;방 안에서 내레이션을 녹음하던 커스틴 존슨은 이렇게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lt;span&gt;&amp;rdquo;. &lt;/span&gt;다시 한번&lt;span&gt;. &amp;ldquo;&lt;/span&gt;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lt;span&gt;&amp;rdquo;. &lt;/span&gt;마지막으로 한번 더&lt;span&gt;. &amp;ldquo;&lt;/span&gt;내가 할 말은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lt;span&gt;. &lt;/span&gt;내가 하고 싶은 말은 &lt;span&gt;&amp;lsquo;&lt;/span&gt;영원하라&lt;span&gt;, &lt;/span&gt;딕 존슨&lt;span&gt;&amp;rsquo;&lt;/span&gt;이다&lt;span&gt;&amp;rdquo;. &lt;/span&gt;녹음을 끝마치고 방을 나가는 그녀를 아버지가 맞이한다&lt;span&gt;. &lt;/span&gt;영화가 끝나도 아버지는 여전히 존재한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아버지의 육체가 떠나도 그의 실존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딸과 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함께 서있다&lt;span&gt;. &lt;/span&gt;이제 영화&lt;span&gt;(&lt;/span&gt;픽션&lt;span&gt;)&lt;/span&gt;는 물러가야 할 때이다&lt;span&gt;.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category>넷플릭스</category>
      <category>딕존슨이죽었습니다</category>
      <category>리뷰</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커스틴존슨</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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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31 Dec 2020 16:07: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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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title>
      <link>https://filmandday.tistory.com/39</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N9h0o/btqIVIcwh2k/HhP0X0kFvrWqG0tkKgKaa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N9h0o/btqIVIcwh2k/HhP0X0kFvrWqG0tkKgKaa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N9h0o/btqIVIcwh2k/HhP0X0kFvrWqG0tkKgKaa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N9h0o%2FbtqIVIcwh2k%2FHhP0X0kFvrWqG0tkKgKaa0%2Fimg.jpg&quot; data-filename=&quot;movie_image.jpg&quot; data-origin-width=&quot;0&quot; data-origin-height=&quot;0&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Content&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1. &lt;/span&gt;한 남자가 황량한 사막에 위치한 상점에 들른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상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상점 주인에게 위협적으로 대화를 이어간다&lt;span&gt;. &lt;/span&gt;그러더니 느닷없이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고 상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앞면에 걸었고 동전도 앞면이 나왔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동전을 넘기고 떠난다&lt;span&gt;. &lt;/span&gt;물론 지금 나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안톤 쉬거와 상점 주인 간의 대화 신을 거칠게 묘사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이 이상한 장면&lt;span&gt;. &lt;/span&gt;이 장면은 분명 밀도 높게 연출되어 있음에도 이후의 서사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이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도 않고 공간적으로 상점이 다시 등장하지도 않는다&lt;span&gt;. &lt;/span&gt;이 신은 서사적으로만 본다면 완전히 독립된&lt;span&gt;, &lt;/span&gt;어쩌면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다&lt;span&gt;. &lt;/span&gt;마치 코엔 형제는 영화를 진행하던 중 잠시 빠져나왔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듯하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lt;span&gt;. &lt;/span&gt;이 신이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은 잉여롭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잉여로운 신이나 쇼트를 허락하지 않는 감독이다&lt;span&gt;(&lt;/span&gt;특히나 &lt;span&gt;&amp;lt;&lt;/span&gt;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lt;span&gt;&amp;gt;&lt;/span&gt;와 같은 걸작에는 더욱&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해당 신은 영화와 독립된 듯한 동시에 낭비되지 않는&lt;span&gt;, &lt;/span&gt;무언가 모순적으로 들리는 장면이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이러한 순간들이 간혹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지금 떠오르는 예&lt;span&gt;. &amp;lt;&lt;/span&gt;시리어스 맨&lt;span&gt;&amp;gt;&lt;/span&gt;의 프롤로그&lt;span&gt;. &lt;/span&gt;먼 옛날 독일&lt;span&gt;. &lt;/span&gt;한 남자가 부부의 집에 방문할 것을 약속한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아내는 남자가 이미 죽은 자이며 남편이 만난 자는 유령이라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남편을 그 말을 믿지 않고 잠시 후 남자가 찾아온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아내는 남자를 칼로 찌른다&lt;span&gt;. &lt;/span&gt;남자는 피를 흘리며 집을 나가고 부부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꺾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남자가 유령인지 아닌지&lt;span&gt;, &lt;/span&gt;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고 프롤로그를 끝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시대는 &lt;span&gt;1960&lt;/span&gt;년대 미국으로 넘어온다&lt;span&gt;. &lt;/span&gt;당연히 이 프롤로그는 이후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 프롤로그가 영화에서 낭비된다는 인상은 전혀 없다&lt;span&gt;. &lt;/span&gt;서사와는 독립되어 있는데 영화의 자장 안에서 한 데 묶인다&lt;span&gt;. &lt;/span&gt;이 장면들을 영화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서사적 유기성이나 메타포와 같은 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리되어 있는 듯한 장면과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그 자체이다&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서사적으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장면을 영화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분리되어 있는듯한 그 장면과 영화 속의 인물들 혹은 세계가 같은 원리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이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이 원리라는 것은 무엇인가&lt;span&gt;? &lt;/span&gt;나는 지금부터 이 질문을 더 깊숙이 밀고 들어가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2. &lt;/span&gt;장면을 조금 자세히 따라가보자&lt;span&gt;. &lt;/span&gt;쉬거가 들어오고 주인과 상투적인 대화가 이어진다&lt;span&gt;. &amp;ldquo;&lt;/span&gt;얼마요&lt;span&gt;?&amp;rdquo; &amp;ldquo;69&lt;/span&gt;센트요&lt;span&gt;&amp;rdquo;. &amp;ldquo;&lt;/span&gt;기름은&lt;span&gt;?&amp;rdquo; &lt;/span&gt;그런데 문제의 다음 대답&lt;span&gt;. &amp;ldquo;&lt;/span&gt;댁 동네엔 비 좀 왔소&lt;span&gt;?&amp;rdquo; &lt;/span&gt;이건 앞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대화를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바꾼다&lt;span&gt;. &lt;/span&gt;그 순간 쉬거의 태도도 돌변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내가 어디서 왔든 무슨 상관이지 친구&lt;span&gt;?&amp;rdquo; &lt;/span&gt;두 인물의 관계는 상점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서 친구로 변한다&lt;span&gt;. &lt;/span&gt;물론 이것은 쉬거가 아닌 주인이 자초한 것이다&lt;span&gt;. &lt;/span&gt;둘은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lt;span&gt;? &lt;/span&gt;주인은 쉬거가 묻는 말에 알맞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마치 두 사람이 친한 것처럼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lt;span&gt;. &lt;/span&gt;질문을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대응한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무엇이 사라지는가&lt;span&gt;? &lt;/span&gt;다시 반복&lt;span&gt;. &lt;/span&gt;쉬거는 상점 주인을 오로지 상점 주인으로 대하며 질문했다&lt;span&gt;. &lt;/span&gt;주인도 쉬거를 손님으로 대하였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갑자기 주인은 쉬거를 손님이 아닌 친구로 대한다&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상점 주인이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상점 주인과 손님이라는 관계적인 규정이다&lt;span&gt;. &lt;/span&gt;둘 사이를 이어주는 상투적인 규정이 사라지는 순간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된다&lt;span&gt;. &lt;/span&gt;그로서 두 인물은 친구가 된다&lt;span&gt;. &lt;/span&gt;친구 관계만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는가&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더 이상 상투적인 규정으로는 자신의 실존을 지탱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이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문을 닫고 도망치려 하지만 쉬거는 그를 붙잡는다&lt;span&gt;. &lt;/span&gt;그리고는 주인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묻는다&lt;span&gt;. &lt;/span&gt;문을 닫는 시간&lt;span&gt;, &lt;/span&gt;잠을 자는 시간&lt;span&gt;, &lt;/span&gt;사는 곳까지&lt;span&gt;. &lt;/span&gt;상점이 원래 장인어른의 것이었다는 말을 듣자 쉬거는 단정하듯이 말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그것 때문에 결혼했군&lt;span&gt;&amp;rdquo;. &lt;/span&gt;이 말에는 근거가 없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상점 주인을 방금 만났다&lt;span&gt;. &lt;/span&gt;그럼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말한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다시 한번&lt;span&gt; 4&lt;/span&gt;년 전에 이곳에 왔다고 말하고 쉬거는 반복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그것 때문에 결혼했군&lt;span&gt;&amp;rdquo;. &lt;/span&gt;이 말을 조금 확장해보자&lt;span&gt;. &lt;/span&gt;영화의 서사에서 쉬거가 쫓는 자는 모스이다&lt;span&gt;. &lt;/span&gt;여기서는 모스가 왜 쫓기는가 대신에 모스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질문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사슴 사냥을 하던 모스는 갱단의 전투로 모든 갱들이 죽어있는 자리에서 돈가방을 발견하고 가져간다&lt;span&gt;. &lt;/span&gt;바꿔 말하면 죽은 자의 물건을 가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lt;span&gt;. &lt;/span&gt;이 메커니즘은 상점 주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lt;span&gt;. &lt;/span&gt;그의 장인어른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장인어른의 상점을 물려받았다&lt;span&gt;. &lt;/span&gt;쉬거의 말은 곧 코엔 형제의 말이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 세계에서 인물들은 죽은 자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lt;span&gt;. &lt;/span&gt;죽은 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lt;span&gt;. &lt;/span&gt;모든 규정이 사라진 곳에서는 우연성과 불확실성만이 남는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 또한 장인어른과 사위라는 규정을 탈피하면 코엔 형제의 인물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상점 주인을 이러한 우연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모든 의미가 무의미해지는 세계&lt;span&gt;. &lt;/span&gt;완전한 우연의 세계&lt;span&gt;. &lt;/span&gt;여기에는 동전 던지기만이 남는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조차 동전을 따라야만 한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잠시 반문&lt;span&gt;. &lt;/span&gt;왜 상점 주인에게는 동전을 던지는가&lt;span&gt;? &lt;/span&gt;우리는 상점 주인과 비슷한&lt;span&gt;, &lt;/span&gt;그러나 동전을 던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은 두 노인을 보았다&lt;span&gt;. &lt;/span&gt;한 사람은 쉬거가 경찰차에서 멈춰 세운 노인&lt;span&gt;. &lt;/span&gt;다른 한 사람은 쉬거를 도와주고자 트럭에서 내린 또 다른 노인&lt;span&gt;. &lt;/span&gt;이 두 인물은 쉬거를 만나자마자 죽임을 당한다&lt;span&gt;. &lt;/span&gt;무엇이 이들을 죽도록 하는가&lt;span&gt;? &lt;/span&gt;첫 번째 노인은 쉬거를 경찰이라고 생각했다&lt;span&gt;. &lt;/span&gt;당연한 일이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는 경찰차에서 내렸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내리자마자 노인을 죽이고 차를 빼앗는다&lt;span&gt;. &lt;/span&gt;두 번째 노인은 차가 고장난 쉬거를 도와주고자 트럭에서 내렸다&lt;span&gt;. &lt;/span&gt;이 노인도 트럭을 빼앗기고 죽는다&lt;span&gt;. &lt;/span&gt;두 노인은 모두 쉬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한 인물들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쉬거는 그러한 규정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다&lt;span&gt;. &lt;/span&gt;그것이 경찰이든&lt;span&gt;, &lt;/span&gt;도움이 필요한 약자이든&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상점 주인은 어떠한가&lt;span&gt;? &lt;/span&gt;처음 쉬거가 왔을 때 쉬거는 상점 주인이라는 규정을 존중하였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그 상점 주인 스스로가 그 규정을 없애고 친구로 다가왔다&lt;span&gt;. &lt;/span&gt;그러니까 쉬거가 그를 친구라고 부른 순간 그것은 위협이 아닌 일종의 환영인 셈이다&lt;span&gt;. &lt;/span&gt;자신의 세계로 들어온 것에 대한 환영&lt;span&gt;. &lt;/span&gt;그런 자를 어떻게 그냥 죽일 수가 있는가&lt;span&gt;? &lt;/span&gt;스스로 우연성의 세계를 선택한 이의 운명은 우연이 결정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동전이 던져진다&lt;span&gt;. &lt;/span&gt;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점 주인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때 쉬거가 말한다&lt;span&gt;. &amp;ldquo;&lt;/span&gt;이게 몇 년도 동전인지 아나&lt;span&gt;? 1958&lt;/span&gt;년&lt;span&gt;. &lt;/span&gt;여기 오는데 &lt;span&gt;22&lt;/span&gt;년 걸렸지&lt;span&gt;&amp;rdquo;. &lt;/span&gt;당연히 동전은 상점 주인에게 오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쉬거의 말은 곧 우연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무슨 목적&lt;span&gt;? &lt;/span&gt;심판&lt;span&gt;. &lt;/span&gt;정확히는 자신의 세계 안에 들어온 인물의 운명에 대한 심판&lt;span&gt;. &lt;/span&gt;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운명은 동전만이 알고 있다&lt;span&gt;. &lt;/span&gt;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동전에게 선택 받는 것이 유일하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상점 주인은 다행히 선택 받았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도 따를 수밖에 없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은 여전히&lt;span&gt;, &lt;/span&gt;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lt;span&gt;. &lt;/span&gt;아 물론 쉬거는 계산할 필요가 없다&lt;span&gt;. &lt;/span&gt;그는 손님이 아닌 친구로서 계산을 끝냈으니&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3. &lt;/span&gt;영화로 돌아가자&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는 르웰린 모스에게는 동전을 던지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모스는 동전을 던질 자격이 없다&lt;span&gt;. &lt;/span&gt;모스는 살해 현장에서 물을 달라고 애원한 갱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그날 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물을 주기 위해 찾아가고 그 현장에서 갱들에게 발각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lt;span&gt;. &lt;/span&gt;이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lt;span&gt;? &lt;/span&gt;처음 현장에서 모스가 죽어가는 갱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모스는 그들과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돈가방을 손에 넣었을 때 그 돈가방은 모스의 것이다&lt;span&gt;. &lt;/span&gt;거래는 실패했고 주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말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모스는 돌아온다&lt;span&gt;. &lt;/span&gt;동정심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든 죽어가던 갱에게 물을 주기 위해 밤늦게 다시 현장으로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그 갱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lt;span&gt;. &lt;/span&gt;그럼에도 모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현장으로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이 순간 모스는 더 이상 제&lt;span&gt;3&lt;/span&gt;자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는 자기 자신을 갱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갱의 자리로 가는 순간 마주하는 갱들&lt;span&gt;. &lt;/span&gt;세계는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순간 그 관계를 따라는 것이 규칙이다&lt;span&gt;(&lt;/span&gt;의도치 않게 쉬거와 친구가 되는 상점 주인을 보라&lt;span&gt;). &lt;/span&gt;하지만 모스는 전력을 다해 도망가고 갱들은 그를 쫓는다&lt;span&gt;. &lt;/span&gt;모스의 진짜 죄는 단순히 돈가방을 훔친 것이 아닌 도망간 것이다&lt;span&gt;. &lt;/span&gt;자신의 자리를 거부한 죄&lt;span&gt;. &lt;/span&gt;갱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곧바로 거부하는 모순&lt;span&gt;. &lt;/span&gt;그러나 한번 자리에 간 이상 그대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lt;span&gt;. &lt;/span&gt;유일한 방법은 그 자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lt;span&gt;, &lt;/span&gt;즉 죽음이다&lt;span&gt;. &lt;/span&gt;갱들은 안톤 쉬거를 고용해 그를 쫓게 한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쉬거는 곧바로 자신을 고용한 갱들은 물론 자신을 뒤쫓던 갱들마저 무자비하게 죽인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갱이 되기를 거부한다&lt;span&gt;. &lt;/span&gt;아니 될 수가 없다&lt;span&gt;. &lt;/span&gt;모든 통념적 규정을 파괴하는 우연적 세계의 쉬거에게는 어떤 규정도 불가능하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갱들이 그를 고용하여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를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lt;span&gt;. &lt;/span&gt;그렇다면 왜 쉬거는 모스를 쫓는 것인가&lt;span&gt;? &lt;/span&gt;갱들에게 고용된 관계가 아니라면 그를 쫓을 이유가 없다&lt;span&gt;. &lt;/span&gt;그렇다고 돈 때문에 모스를 쫓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모스에게 분명하게 돈을 가져와도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시선을 모스에서 돈가방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lt;span&gt;. &lt;/span&gt;돈가방의 원래 주인이었던 갱들의 거래가 실패로 끝나자 돈가방은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lt;span&gt;. &lt;/span&gt;이를 발견한 모스는 가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모스는 다시 갱을 찾아갔고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갱의 자리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온다&lt;span&gt;. &lt;/span&gt;이때 모스가 그 자리에 들고 간 것은 돈가방이 아닌 물병이다&lt;span&gt;. &lt;/span&gt;이건 일종의 거래이다&lt;span&gt;. &lt;/span&gt;돈가방을 가져왔으니 그 대가로 무언가를 주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lt;span&gt;. &lt;/span&gt;그러면서 모스는 돈가방을 정식으로 가지고 싶어 한다&lt;span&gt;(&lt;/span&gt;상점 주인이 장인 어른으로부터 상점을 물려 받은 것과 유사한 맥락&lt;span&gt;). &lt;/span&gt;하지만 이건 자의적인 거래이다&lt;span&gt;. &lt;/span&gt;갱들은 이러한 거래를 제안한 적이 없다&lt;span&gt;. &lt;/span&gt;돈가방은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한다&lt;span&gt;. &lt;/span&gt;물병은 그 자리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모스가 갱의 자리에 들어갔다면 원래 있어야 할 물건&lt;span&gt;, &lt;/span&gt;돈가방을 그 자리에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lt;span&gt;. &lt;/span&gt;갱들이 모스를 쫓는 것은 그 순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함이다&lt;span&gt;. &lt;/span&gt;원래 자신들의 것이니 자신들이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lt;span&gt;? &lt;/span&gt;하지만 안톤 쉬거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자신을 고용한 갱들을 그렇게 죽일 리가 없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갱들과 자신의 관계&lt;span&gt;, &lt;/span&gt;고용과 피고용 관계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돈가방을 주인 없는 상태&lt;span&gt;, &lt;/span&gt;다시 말해 완전한 공&lt;span&gt;(&lt;/span&gt;空&lt;span&gt;)&lt;/span&gt;의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우연은 모든 규칙을 파괴한다&lt;span&gt;. &lt;/span&gt;그 모든 규칙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기표는 고유의 기의를 잃어버린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기표&lt;span&gt;. &lt;/span&gt;세 개의 기의&lt;span&gt;. &lt;/span&gt;원래의 규칙을 회복하려는 자들과 새로운 규칙을 만들려는 자&lt;span&gt;. &lt;/span&gt;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없애려는 자&lt;span&gt;. &lt;/span&gt;쫓는 것은 하나인데 세 개의 운동이 발생한다&lt;span&gt;. &lt;/span&gt;이 세 개의 운동은 서로 이상한 방식으로 충돌하고 교차한다&lt;span&gt;. &lt;/span&gt;이 모든 운동은 안톤 쉬거의 관장 아래서 진행되다가 멈추고 새로 시작한다&lt;span&gt;. &lt;/span&gt;이상하리만큼 안톤 쉬거는 갱과 모스&lt;span&gt;, &lt;/span&gt;심지어 칼라 진의 동선까지 모든 것을 알고 움직인다&lt;span&gt;. &lt;/span&gt;영화 초반부에 모스의 집과 통화 기록&lt;span&gt;, &lt;/span&gt;수신기 등을 통해 모스를 추적하는 것이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인물들의 동선을 추적하는지가 불분명해진다&lt;span&gt;. &lt;/span&gt;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알고 있다&lt;span&gt;. &lt;/span&gt;세계를 자신만의 규칙으로 정의하려는 운동은 우연의 운동 앞에서 실패로 끝난다&lt;span&gt;. &lt;/span&gt;영화가 끝나면 돈가방의 행방은 완전히 생략된다&lt;span&gt;. &lt;/span&gt;결국 모든 규칙은 우연의 범주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유일한 원리이다&lt;span&gt;. &lt;/span&gt;우연과 불확실성&lt;span&gt;. &lt;/span&gt;모든 것을 아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닌 자이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4. &lt;/span&gt;여기에 한 가지 운동을 더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갱과 모스&lt;span&gt;, &lt;/span&gt;그리고 쉬거를 모두 쫓는 보안관 에드 톰 벨&lt;span&gt;. &lt;/span&gt;벨은 분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보안관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모스와 쉬거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는 것뿐이다&lt;span&gt;. &lt;/span&gt;따라간다는 말&lt;span&gt;. &lt;/span&gt;이건 쫓아간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lt;span&gt;. &lt;/span&gt;쫓아간다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쫓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벨은 모스와 갱의 현장&lt;span&gt;, &lt;/span&gt;쉬거의 현장을 바라보며 사태를 정리할 뿐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른다&lt;span&gt;. &lt;/span&gt;대상의 생략&lt;span&gt;. &lt;/span&gt;여기에 한 가지 더&lt;span&gt;. &lt;/span&gt;영화가 끝날 때까지 벨은 인물이 아닌 이미 일어난 사태만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lt;span&gt;. &lt;/span&gt;너무나도 무기력하게&lt;span&gt;. &lt;/span&gt;이건 쫓는 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무언가를 쫓고 있다면 쫓고 있다는 행위가 대상에게 영향을 미쳐야 마땅하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벨은 모스에게도&lt;span&gt;, &lt;/span&gt;쉬거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심지어 서사에서도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lt;span&gt;. &lt;/span&gt;이 노인 보안관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전부이다&lt;span&gt;. &lt;/span&gt;그럼 이 인물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lt;span&gt;? &lt;/span&gt;단순한 대답&lt;span&gt;. &lt;/span&gt;그는 따라가라고 있는 인물이다&lt;span&gt;. &lt;/span&gt;왜 따라가야 하는가&lt;span&gt;? &lt;/span&gt;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스와 쉬거&lt;span&gt;, &lt;/span&gt;그리고 벨이 한 번도 한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들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할 수가 없다&lt;span&gt;. &lt;/span&gt;하나의 운동이 프레임이라는 세계에 존재한다면 다른 운동은 프레임 바깥에 있거나 그 운동을 소멸시켜야 한다&lt;span&gt;. &lt;/span&gt;규칙의 운동과 우연의 운동&lt;span&gt;. &lt;/span&gt;유&lt;span&gt;(&lt;/span&gt;有&lt;span&gt;)&lt;/span&gt;의 운동과 무&lt;span&gt;(&lt;/span&gt;無&lt;span&gt;)&lt;/span&gt;의 운동&lt;span&gt;. &lt;/span&gt;이 둘이 공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lt;span&gt;. &lt;/span&gt;벨은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는가&lt;span&gt;? &lt;/span&gt;모스와 쉬거를 따라가면서 벨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막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무슨 사태&lt;span&gt;? &lt;/span&gt;두 운동의 충돌&lt;span&gt;. &lt;/span&gt;모순적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한 쪽은 반드시 소멸한다&lt;span&gt;. &lt;/span&gt;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운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 벨의 목적이다&lt;span&gt;. &lt;/span&gt;운동이 멈추는 순간 사태는 정지하고 그에 대한 해석만이 남게 된다&lt;span&gt;. &lt;/span&gt;벨은 이 모든 사태를 자신의 해석의 범주 안에 가두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이것은 달리 말하면 노인의 방식이다&lt;span&gt;. &lt;/span&gt;세계를 해석 가능한 무엇으로 보는 것&lt;span&gt;. &lt;/span&gt;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것&lt;span&gt;. &lt;/span&gt;물론 이는 칸트와 같은 철학자로 대변되는 근대의 방법론이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한 번 시작한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노인의 방식은 현상을 과거에 잡아두면서 시간의 흐름을 멈추도록 하고자 하는&lt;span&gt;, &lt;/span&gt;시간의 힘을 없애고자 하는 방식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의 편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현재는 어떤 식으로든 운동하고 미래로 나아간다&lt;span&gt;. &lt;/span&gt;모스와 쉬거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고 있다&lt;span&gt;. &lt;/span&gt;이 과정에서 노인의 방식&lt;span&gt;, &lt;/span&gt;노인의 이해는 희생된다&lt;span&gt;. &lt;/span&gt;영화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안톤 쉬거에게 희생되는 노인들을 떠올려보라&lt;span&gt;. &lt;/span&gt;그들은 처음에 쉬거를 잡았다고 안심했으나 그는 곧 도망간다&lt;span&gt;. &lt;/span&gt;우연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lt;span&gt;. &lt;/span&gt;이러한 측면에서 모스와 칼슨 역시 노인의 방식으로 쉬거와 마주한다&lt;span&gt;. &lt;/span&gt;그들 역시 쉬거를 죽일 수 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있다&lt;span&gt;. &lt;/span&gt;단지 그 지향점이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을 뿐이다&lt;span&gt;. &lt;/span&gt;우연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lt;span&gt;. &lt;/span&gt;그 헛된 믿음은 얼마 안가 깨지고 만다&lt;span&gt;. &lt;/span&gt;과거의 방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욕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노인이 말하는 그런 과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lt;span&gt;. &lt;/span&gt;영화 후반 엘리스를 찾아간 벨은 과거에 맥이라는 인물에게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듣는다&lt;span&gt;. 1980&lt;/span&gt;년으로부터 한참 전인 &lt;span&gt;1909&lt;/span&gt;년의 일이다&lt;span&gt;. &lt;/span&gt;그들이 걱정하던 미래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당연한 순환이다&lt;span&gt;. &lt;/span&gt;모스와 같은 자들이 노인들을 본받아 미래를 만들어 가는 세상이니&lt;span&gt;. &lt;/span&gt;그런 자들은 쉬거와 같은 자들에게 죽어가니 세상은 피바다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lt;span&gt;. &lt;/span&gt;노인의 방식&lt;span&gt;(&lt;/span&gt;혹은 미국의 방식&lt;span&gt;, &lt;/span&gt;또는 서부극의 방식&lt;span&gt;)&lt;/span&gt;의 종말&lt;span&gt;. &lt;/span&gt;이 방식은 안톤 쉬거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다&lt;span&gt;. &lt;/span&gt;이런 나라는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lt;span&gt;(&lt;/span&gt;한국의 영화 제목인 &lt;span&gt;&amp;lt;&lt;/span&gt;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lt;span&gt;&amp;gt;&lt;/span&gt;가 오역인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lt;span&gt;). &lt;/span&gt;무기력한 벨은 그렇게 물러간다&lt;span&gt;. &lt;/span&gt;은퇴 후 평화로운 아침 식사 자리&lt;span&gt;, &lt;/span&gt;벨은 아내에게 자신이 꾼 두 가지 꿈 이야기를 해준다&lt;span&gt;. &lt;/span&gt;두 꿈에는 모두 아버지가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첫 번째 꿈에서 벨은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다&lt;span&gt;. &lt;/span&gt;두 번째 꿈에서 벨은 춥고 좁은 오솔길에서 아버지의 횃불을 따라가 아버지를 마주하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두 가지를 합치면 벨의 현재이다&lt;span&gt;. &lt;/span&gt;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잃어버렸으나 그 유산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의 길을 다시 따라가고자 한다&lt;span&gt;. &lt;/span&gt;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거와 같은 자에게 맞서고 싶어 하는 노인&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 꿈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 영화에 꿈 혹은 환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lt;span&gt;. &lt;/span&gt;이를테면 &lt;span&gt;&amp;lt;&lt;/span&gt;밀러스 크로싱&lt;span&gt;&amp;gt;, &amp;lt;&lt;/span&gt;위대한 레보스키&lt;span&gt;&amp;gt;, &amp;lt;&lt;/span&gt;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lt;span&gt;&amp;gt;, &lt;/span&gt;그리고 &lt;span&gt;&amp;lt;&lt;/span&gt;시리어스 맨&lt;span&gt;&amp;gt;. &lt;/span&gt;여기 등장하는 꿈이나 환상은 모두 영화에서 묘사되지만 벨의 꿈은 나오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그런데 이전에 벨의 꿈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모스가 죽은 현장을 찾아간 벨은 문을 열기 전 쉬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문을 열기를 망설인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화면에는 총을 들고 문 뒤에 숨은 쉬거가 등장한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당연히 그 둘이 만날 것을 예상한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그 방에는 아무도 없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도망간 것일까&lt;span&gt;? &lt;/span&gt;하지만 도망갈 수 있을만한 길이 없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그가 창문으로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굳게 잠긴 창문을 인서트 하여 보여준다&lt;span&gt;. &lt;/span&gt;어쩌면 그 장면은 벨의 상상이 아닐까&lt;span&gt;? &lt;/span&gt;만약 그렇다면 왜 굳이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가&lt;span&gt;? &lt;/span&gt;벨이 마지막에 꾼 꿈&lt;span&gt;. &lt;/span&gt;그 꿈의 세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문 뒤에 안톤 쉬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전부이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줄 생각이 없다&lt;span&gt;. &lt;/span&gt;영화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lt;span&gt;, &lt;/span&gt;불확실함만이 남은 세계이다&lt;span&gt;. &lt;/span&gt;이 악몽과도 같은 세계&lt;span&gt;. &lt;/span&gt;다시 한번&lt;span&gt;. &lt;/span&gt;이건 분명히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gt;5. &lt;/span&gt;쉬거는 모든 것을 이룬 뒤 모든 것을 잃은 칼라 진을 찾아간다&lt;span&gt;. &lt;/span&gt;그녀를 찾아간 이유는 단 하나이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분명 모스에게 돈을 가져오면 진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lt;span&gt;. &lt;/span&gt;하지만 가져오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무언가 이상한 약속&lt;span&gt;. &lt;/span&gt;진과 쉬거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다&lt;span&gt;. &lt;/span&gt;영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모스가 시키는 대로 따라다닐 뿐이다&lt;span&gt;(&lt;/span&gt;영화 속에서 또 다른 &lt;span&gt;&amp;lsquo;&lt;/span&gt;따라다니는 자&lt;span&gt;&amp;rsquo;&lt;/span&gt;인 벨을 만나는 것도 진이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분명 모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lt;span&gt;. &lt;/span&gt;스스로 쉬거의 세계&lt;span&gt;, &lt;/span&gt;우연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선택&lt;span&gt;. &lt;/span&gt;이 순간 모스의 운동은 정지하고 진의 운동 또한 멈춘다&lt;span&gt;. &lt;/span&gt;진의 운동&lt;span&gt;? &lt;/span&gt;그녀의 운동은 철저히 남편인 모스의 운동에 종속되는 운동이다&lt;span&gt;. &lt;/span&gt;이때 진의 운동은 모스의 운동을 위한 수단이자 근거이다&lt;span&gt;. &lt;/span&gt;가족을 지키기 위한 운동&lt;span&gt;. &lt;/span&gt;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키려는 운동&lt;span&gt;. &lt;/span&gt;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의 전제조건&lt;span&gt;(&lt;/span&gt;벨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전제조건은 범죄자와 보안관이라는 관계적 규정이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가 제안하는 것은 이 운동의 근거를 포기하라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포기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lt;span&gt;? &lt;/span&gt;모스의 운동을 지속시켰던 근거가 사라지면서 그를 유지하던 가족이라는 관계는 의미를 잃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상태&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과 같은 상태가 된다&lt;span&gt;. &lt;/span&gt;당연히 운동의 목적이던 고유의 규칙 생성의 시도도 실패한다&lt;span&gt;. &lt;/span&gt;대신 근거의 실체이던 진 역시 모스와의 관계가 소멸되면서 이 모든 운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lt;span&gt;. &lt;/span&gt;그렇게만 된다면 진은 쉬거에게 죽을 이유가 없어진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모스는 자신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이 운동은 모스가 죽는다고 멈추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진이 여전히 그 관계 안에 남아있는 한 운동은 지속된다&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는 운동의 완전한 소멸을 위해서 칼라 진을 죽어야 한다&lt;span&gt;. &lt;/span&gt;진을 만나 대화가 이어지던 중 동전을 던지는 안톤 쉬거&lt;span&gt;. &lt;/span&gt;그녀는 상점 주인과 다르다&lt;span&gt;. &lt;/span&gt;상점 주인이 스스로 우연의 세계로 걸어 들어와 동전을 만났다면 그녀는 한 번도 그 세계로 들어간 적이 없다&lt;span&gt;. &lt;/span&gt;쉬거는 동전을 던질 이유가 없다&lt;span&gt;. &lt;/span&gt;그럼에도 기꺼이 동전을 던진다&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일종의 선의인 셈이다&lt;span&gt;. &lt;/span&gt;우연의 선의&lt;span&gt;. &lt;/span&gt;그 세계로 들어오라는 제안&lt;span&gt;. &lt;/span&gt;하지만 진은 끝까지 거부한다&lt;span&gt;. &lt;/span&gt;선의를 스스로 거부한 그녀에게 동전을 던질 자격은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동전을 거부한 진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분명히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의 죽음을 생략한다&lt;span&gt;. &lt;/span&gt;초반부에 그렇게 자세히 묘사되던 보안관과 차를 빼앗긴 노인의 죽음과 달리 모스의 죽음&lt;span&gt;, &lt;/span&gt;진의 죽음&lt;span&gt;, &lt;/span&gt;심지어 진의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코엔 형제도 아는 것이다&lt;span&gt;. &lt;/span&gt;더 이상 영화에서 인과성이나 당위성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lt;span&gt;. &lt;/span&gt;극이 진행될수록 안톤 쉬거는 영화를 장악해 나간다&lt;span&gt;. &lt;/span&gt;인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오로지 우연과 불확실성으로만 움직인다&lt;span&gt;. &lt;/span&gt;영화의 운동마저 안톤 쉬거에게 패배한다&lt;span&gt;. &lt;/span&gt;모든 운동을 없앤 안톤 쉬거&lt;span&gt;. &lt;/span&gt;영화가 끝나갈 무렵 코엔 형제는 갑자기 방향을 트는 듯이 이상한 사건을 개입시킨다&lt;span&gt;. &lt;/span&gt;차를 운전하던 쉬거는 초록색 신호등을 보고 운전하다 갑자기 다른 차와 충돌한다&lt;span&gt;(&lt;/span&gt;그 차에 누가 탔는지는 나오지 않는다&lt;span&gt;). &lt;/span&gt;차에서 내린 뒤 따라오던 두 소년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존재를 함구하게 만든 후 사라지는 안톤 쉬거&lt;span&gt;. &lt;/span&gt;우리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lt;span&gt;. &lt;/span&gt;멕시코 국경에서 피를 흘리며 걸어가던 모스가 청년들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사는 장면&lt;span&gt;. &lt;/span&gt;이를 쉬거가 반복한다&lt;span&gt;. &lt;/span&gt;여기서 주의할 점&lt;span&gt;. &lt;/span&gt;모스와 쉬거의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lt;span&gt;. &lt;/span&gt;모스는 돈을 주고 청년들과 옷을 교환했지만 쉬거는 소년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산 것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옷은 그냥 받은 것이다&lt;span&gt;. &lt;/span&gt;그때 교환한 것은 돈과 존재이다&lt;span&gt;. &lt;/span&gt;자신의 존재를 부재로 만드는 선택&lt;span&gt;. &lt;/span&gt;모스는 생명의 연장을 샀지만 쉬거는 죽음을 산다&lt;span&gt;. &lt;/span&gt;왜 그래야 하는가&lt;span&gt;? &lt;/span&gt;영화에서 모든 운동은 멈춘 상태이다&lt;span&gt;. &lt;/span&gt;모스도&lt;span&gt;, &lt;/span&gt;벨도&lt;span&gt;, &lt;/span&gt;그리고 갱의 운동까지 멈추고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이제 남은 것은 우연 스스로의 운동&lt;span&gt;, &lt;/span&gt;안톤 쉬거의 운동이다&lt;span&gt;. &lt;/span&gt;그러나 안톤 쉬거는 이 운동의 주인이 아니다&lt;span&gt;. &lt;/span&gt;그조차 동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lt;span&gt;. &lt;/span&gt;그는 우연을 운동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운동 안에 포함되어 있다&lt;span&gt;. &lt;/span&gt;자신이 작동시키는 세계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lt;span&gt;. &lt;/span&gt;말하자면 일종의 자기 파괴&lt;span&gt;. &lt;/span&gt;그 세계를 움직이게 하던 다른 운동들이 모두 소멸했으니 마지막 동력&lt;span&gt;, &lt;/span&gt;우연 스스로가 세계를 움직인다&lt;span&gt;. &lt;/span&gt;그러니 쉬거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lt;span&gt;. &lt;/span&gt;세계를 우연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던 그는 성취를 이룬 후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규정&lt;span&gt;, &lt;/span&gt;존재마저 부재로 만들고 완전히 자신의 세계&lt;span&gt;, &lt;/span&gt;우연의 세계로 들어간다&lt;span&gt;. &lt;/span&gt;죽음이라는 삶&lt;span&gt;. &lt;/span&gt;부재라는 존재&lt;span&gt;. &lt;/span&gt;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간 안톤 쉬거는 영화에서도 사라진다&lt;span&gt;. &lt;/span&gt;일종의 승전보&lt;span&gt;. &lt;/span&gt;이 장면의 끝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디졸브로 처리 된다&lt;span&gt;. &lt;/span&gt;피를 흘리며 걸어가는 쉬거의 모습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벨의 얼굴과 겹쳐진다&lt;span&gt;. &lt;/span&gt;이 때문에 마치 벨이 걸어가는 안톤 쉬거를 보는 것만 같다&lt;span&gt;. &lt;/span&gt;그리고 아내에게 들려주는 두 개의 꿈&lt;span&gt;. &lt;/span&gt;불가능한 꿈&lt;span&gt;. &lt;/span&gt;마치 안톤 쉬거가 사라진 세계를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바로잡고 싶어하는 듯한 벨&lt;span&gt;. &lt;/span&gt;하지만 쉬거는 패배하지 않았다&lt;span&gt;. &lt;/span&gt;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을 뿐 언젠가 그가 다시 필요해질 때 돌아올 것이다&lt;span&gt;. &lt;/span&gt;아니&lt;span&gt;, &lt;/span&gt;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lt;span&gt;. &lt;/span&gt;우리는 안톤 쉬거의 세계에 살고 있다&lt;span&gt;. &lt;/span&gt;누구의 원리도 아닌 안톤 쉬거의 원리만이 세계를 움직인다&lt;span&gt;. &lt;/span&gt;영화는 한없이 무기력하게 보이는 노인의 얼굴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끝을 맺는다&lt;span&gt;.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영화 리뷰</category>
      <category>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category>
      <category>리뷰</category>
      <category>영화</category>
      <category>영화리뷰</category>
      <category>코엔형제</category>
      <author>영대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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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Sep 2020 13:22: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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